잠에서 깨어난 공주는 칼을 들어 기사를 위협하고, 악당 취급을 받는 용은 알고 보니 꽤 괜찮은 녀석이다.
무슬림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살벌한 권력 투쟁을 벌이는 여성 사이에서 남성은 쩌리가 된다.
남편에게 학대받는 줄 알았던 여인은 실은 그 상황을 즐기는 흡혈귀였고,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섬멸하는 지휘관은 공주님이다.
고정관념을 전복하는 상상력이 생각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소설집이었다.
초반의 '높은 탑에 공주와' '달빛 아래 기사와' '사랑하는 그대와' 3부작은 읽는 내내 피식피식 웃게 했다.
세 작품은 연작이라고 볼 수 있지만, 사실상 한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세 작품만 따로 떼어내 경장편으로 선보이고, 애니메이션(실사 영화는 놉!)으로 각색하면 대단히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올 듯하다.
작가가 무척 신나게 썼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 작품들이었다.
연작의 바로 뒤에 이어지는 '사막의 빛'은 문명의 교차를 다룬 긴 여정을 다루는데, 작품 전체에 드리워진 신비로운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다.
다만 무협지를 방불케 하는 표제작 '여자들의 왕'을 비롯해 후반에 실린 작품의 밀도는 전반의 연작보다 떨어져 아쉬웠다.
제목만 보고 여성이 남성을 때려잡는 이야기의 모음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쓸데없는 오해다.
현실에서 성별 때문에 겪는 한계를 극복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고전 형태로 변주하는 유쾌하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라고 보는 게 적절하겠다.
굳이 깊이 의미를 파고들려 하지 않아도 즐거운 독서가 가능한 소설집이다.
거두절미하고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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