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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고요한 장편소설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나무옆의자)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2. 9. 8.

 


나는 20대 말에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깊은 밤에 좁은 고시원 방에 홀로 누워 아무런 미래도 보이지 않는 현실을 고민하다 보면 금세 새벽이 왔다.
사나흘 동안 깨어있는 경우도 잦았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 술을 마셔도 취하기만 할 뿐이었다.
내 선택은 몸을 움직여 지치게 만들기였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나는 고시원에서 1km가량 떨어진 청계천까지 와서 광화문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물길을 따라 황학교, 오간수교, 마전교, 관수교, 수표교, 광교, 광통교를 걷다 보면 어느새 청계광장 뿔탑 앞에 다다랐다.
거기서 잠시 쉬었다가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거슬러 황학교까지 걷고 고시원으로 돌아가거나, 조금 더 걸어서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두물머리까지 걸었다.
그렇게 걷고 고시원으로 돌아오면 언제 불면증을 앓았냐는 듯 쉽게 잠이 들었다.
그때 내가 청계천을 걸어서 왕복한 횟수가 못 해도 수십번이다.
청계천의 밤을 수백km나 반복해 걸었으니 그때 눈에 담은 야경이 머릿속에서 지워질 리가 없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내가 경험한 청계천의 밤이 페이지에 오버랩됐다.

취업에 실패해 장례식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주인공은 일이 끝나면 스쿠터를 타고 도시를 방황하며 24시간 맥도날드 매장을 떠돈다.
광화문, 서대문, 정동...
주인공이 방황하는 공간은 내가 기자 생활을 10년 넘게 하는 사이에 익숙해진 공간이어서 생생했다.
어렸을 때 자기 때문에 누나가 죽었다는 죄책감, 대학 졸업 후 안정된 직장을 찾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불안감, 가족의 해체로 인한 상실감이 주인공을 짓누른다.
방황은 그런 답답한 마음으로부터 잠시나마 해방을 맛보게 하지만. 방황은 어디까지나 방황일 뿐이다.
현실은 방황으로 바뀌지 않으니 말이다.

나아질 미래가 보이지 않은 삶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작품은 죽음을 상징하는 공간인 장례식장을 통해 그 질문에 관한 답을 내놓으려고 시도한다.
이 작품이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심각하지 않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을 독자에게 상기하려는 듯 담담한 일상으로 묘사할 뿐이다.
당연한 묘사인데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죽음이라는 삶의 당연한 결말을 당연하게 묘사하는 경우는 드무니 말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죽음은 어떻게 살아야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장치다.
지금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려는 의지가 아름다운 죽음을 맞는 방법이란 게 이 작품의 결론이다.
뻔한 결론인데, 결론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다정해 마음의 빗장을 풀게 한다.

주인공의 미래가 극적으로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의 방황이 무의미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만약 내가 잠들지 못하는 밤에 청계천을 걷는 대신, 고시원 방에서 홀로 술에 취해 나를 파괴하고 있었다면 20대 말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을까.
스쿠터를 몰며 서울의 밤을 통과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건강하게 느껴졌다.

쓸쓸하면서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블랙코미디가 지배하는 작가의 전작 소설집 <사랑이 스테이크라니>보다 내게 더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하비누아주의 '청춘'을 이 작품의 BGM으로 깔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