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더 펼쳐보지 않을 게 확실한 한국문학 단행본을 정리하다가, 사놓고 읽지 않은 단행본을 몇 권 건졌다.
이 작품은 그때 뒤늦게 서재에서 바깥으로 나와 나를 만났다.
마침 안주 관련 산문집 출간을 준비 중이어서 이 작품의 제목에 혹했다.
"진즉 읽을걸. 재미있네."
다 읽은 뒤 살짝 후회했다.
권여선 작가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만큼 술을 부르되 그보다는 산뜻한 주류(酒類) 문학이었다.
오너 셰프를 꿈꾸며 푸드 트럭을 운영하다가 망하기 전에 정리한 주인공.
망원동 일대 술집 정보에 빠삭한 주인공의 대학 동기.
모종의 이유로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주인공의 사촌 언니.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진 매력적인 등장인물이 주종을 가리지 않고 홈쇼핑에 등장해 갈비를 뜯는 모델처럼 맛깔나게 마셔대니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침이 고였다.
술과 음식 묘사가 보통이 아니다.
많이 마시고 먹어보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묘사다.
게다가 작품의 주된 배경인 망원동이 내가 음악 기자 시절에 몇 년 동안 제집처럼 드나든 곳이어서 더 생생했다.
맛집 탐방을 기대하며 이 작품을 읽으면 곤란하다.
이 작품에서 술은 등장인물이 현실과 고민을 직시하게 만드는 거울이자,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윤활유로 쓰인다.
만약 술이 없었다면 이 작품의 톤은 다소 어두웠을 테다.
본인도 애주가임이 확실한 작가는 술이라는 요소를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여내 귀여운 주사를 부린다.
이 정도 주사라면 기꺼이 받아줄 수 있다.
김호연 작가의 장편소설 <망원동 브라더스>의 등장인물을 모두 여성으로 바꾸면 이런 느낌의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밤에 읽으면 위험한 작품이다.
p.s.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술 중 수박 보드카가 가장 당겼다.
수박에 살짝 구멍을 뚫어 보드카를 쏟아붓고 재워서 퍼먹는 술이라니.
내년 여름에 시도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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