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다루는 곡은 1980년대에서 2020년대 사이에 발표된 다양한 장르의 가요와 팝을 망라하는데, 대부분 유명한 곡이다.
음악 좀 들었다는 30대 중반 이상이라면 모르는 곡을 찾기 힘들 테다.
여름이면 메가데스, 판테라, 크래쉬, 메써드를 듣는다고 고백하는 저자는 자신의 취향을 뒤로 미루고 어렵지 않은 언어로 친절하게 곡의 의미를 짚어나간다.
이 책은 '사랑과 이별의 순간'을 비롯해 6개의 대분류로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대분류 아래에 다양한 상황과 감정에 어울리는 32개 소분류로 플레이리스트를 세분화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이 책은 곡에 관한 설명에 그치지 않고 스트리밍 사이트 벅스뮤직과 연결된 QR코드를 삽입해 책을 읽으면서 편하게 곡을 감상할 수 있게 배려했다.
우선 수록곡에 관한 자신의 의견과 저자의 의견을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플레이리스트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서로 다른 주관이 만나 교집합을 이뤘을 때 특유의 즐거움이 있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이 밤새도록 음악 이야기를 해도 질리지 않는 이유다.
이를테면 천용성에게서 브로콜리너마저를, 김제형에게서 윤상과 통하는 점을 짚는 해설에서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체리필터의 '낭만고양이'로 저자와 다른 2002년의 기억을 추억을 더듬게 하고, 자우림 초기 앨범의 야생성을 좋아한다는 의견에선 "나도 나도!"를 외치게 한다.
퀸의 'Love of my life'를 다루며 심은하 주연 MBC 드라마 'M'을 언급할 땐 자연스럽게 무더웠던 1994년 여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보다 더 큰 재미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곡에 관해 더 많은 걸 알게 되는 재미다.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았군요'을 둘러싼 소유권 비화를 접하며 노래의 주인은 따로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최성수의 '풀잎사랑'이 서울올림픽 괌 선수단 입장 때 흘렀다는 뒷이야기, 이광조의 데뷔가 홍대 미대와 서울대 미대의 체육대회 뒤풀이 자리 때문이었다는 뒷이야기 등은 나중에 술자리에서 써먹기에 좋은 TMI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에 강인원이 작곡뿐만 아니라 노래까지 부르게 된 계기가 김현식의 건강 문제 때문이었음을 알게 될 땐 기분이 무거워진다.
다섯손가락이 '젊음의 행진' 오디션 합격 때문에 대학가요제에 못 나갔다는 비화에선 피식 웃음이 나온다.
작사자와 작곡자뿐만 아니라 편곡자의 의미를 짚은 해설도 의미가 있다.
조덕배의 곡을 편곡한 변성용의 커리어, 보아의 '넘버원' 가사에 얽힌 뒷이야기, 노이즈의 히트곡 '상상속의 너'와 '어제와 다른 오늘'의 편곡자가 김건모였다는 정보 등은 새삼 곡을 다시 주의 깊게 듣게 만드는 기록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뮤지션이나 곡을 알게 해주기도 한다.
내겐 나태주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백효은과 오창민의 '끝끝내', 얼바노 같은 뮤지션이 그런 경우였다.
학창 시절, 용돈을 아껴 모아 산 '정품' 앨범을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는 건 사치였다.
나는 앨범을 몇 차례 반복해 들은 뒤 그중 마음에 드는 곡을 메모해 리스트를 만들었다.
리스트가 완성되면 쉬는 날에 더블데크 앞에 앉아 마치 의식을 치르듯 몇 시간에 걸쳐 공테이프로 내가 '픽'한 곡을 옮겼다.
세상에 하나뿐인 플레이리스트를 담은 공테이프가 워크맨 속에서 늘어질 때까지 나와 함께 했고, 귀하신 몸인 '정품' 앨범은 감히 케이스에 기스가 나지 않도록 보관에 신경을 썼다.
이후에도 매체의 형태만 달라졌을 뿐 음악을 듣는 방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MP3플레이어가 대세였던 시절에는 제한된 용량의 메모리에 어떤 파일을 집어넣느냐를 고민했고, 스마트폰으로 스트리밍을 즐기는 요즘에는 플레이리스트에서 수시로 곡을 빼거나 집어넣는다.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기 점점 편한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편한 음악 스트리밍 앱에도 맹점이 있다.
앱이 AI로 추천하는 곡은 기가 막히게 내 취향에 맞지만, 추천곡에만 매몰되면 AI는 또 비슷한 음악을 기가 막히게 골라와 다른 세계를 가진 음악과의 접근을 부드럽게 차단한다.
자신의 플레이리스트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느꼈다면, 이 책은 자신이 들어온 음악을 되새김질하고 플레이리스트를 재정리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매일 의무처럼 신보를 허겁지겁 듣다가 오랜만에 책을 통해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기대 이상으로 즐거우며 유익하다.
각 잡고 앉아 짧은 시간에 눈으로만 읽는 독법은 이 책과 어울리지 않는다.
며칠에 걸쳐 플레이리스트를 따라 들으며 읽기를 추천한다.
나도 그렇게 읽었다.
p.s. 나중에 2쇄를 찍어 17페이지 8번째 줄의 '김성욱'을 '이성욱'으로 고칠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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