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면 글쓰기를 제외한 모든 게 흥미롭고 재미있어진다.
마치 학창 시절에 시험 전날이면 꼭 청소하고 싶어졌듯이.
쓰고 있는 글이 반드시 써야 하는 글인데 잘 풀리지 않으면 더 그렇다.
최근에 나는 미친 듯이 많은 책을 읽었다.
무협지에 빠져 살았던 학창 시절 이후로 이렇게 독서가 재미있기는 오랜만이었다.
책을 읽지 않을 땐 나무위키에 들어가 떠오르는 키워드를 닥치는대로 검색했다.
하지만 꼭 해야 할 일인 드라마 각본 집필만 계속 뒤로 미뤄졌다.
집필을 미루고 있다는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읽은 책이 한국문학이면 SNS에 감상을 꼬박꼬박 남겼다.
심지어 올해 안에 마감하기 힘들 줄 알았던 첫 산문집 초고 집필까지 마감 일자보다 빨리 끝냈다.
그러다 보니 각본 집필이 더 뒤로 미뤄지는 부작용이 일어났다.
새벽에 이 산문집을 읽고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부작용의 증거다.
그래도 이 산문집이 내게 꽤 위안이 됐다.
저마다 모습은 조금씩 달랐지만, 나름 글로 먹고산다는 사람들이 이토록 절실하게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이 산문집에 실은 글조차 쓰고 싶지 않았다는 저자들의 고백이 넘쳐난다.
집필 계약을 하고 돈을 받았으니 어쩔 수 없이 쓴다질 않나, 글을 쓰기 싫은 이유를 수십 개나 밝히질 않나, 의식의 흐름대로 주저리주저리 문장을 늘어놓지 않나.
전부 내 이야기 같았다.
나도 계약서를 쓰고 아직 출간하지 않은 책이 무엇무엇이 있나 떠올려봤다.
장편소설 두 개, 소설집 하나, 산문집 하나, 그밖에 단편 등...
아찔하다.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아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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