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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고호 장편소설 <노비종친회>(델피노)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2. 10. 7.

 


근엄한 단어인 '종친회'에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노비'라니.
오로지 제목 하나에 끌려 집어 든 작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서 읽고 후회하지 않았다.
한국 소설에선 드문 따뜻하고 유쾌한 코미디물이었다.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희성인 헌 씨들이 모여 종친회를 만들고 뿌리를 찾는 이야기'다.
주인공을 비롯해 이 작품에 등장하는 헌 씨들은 소싯적부터 설움을 많이 받아왔다.
'현' 씨로 오해받는 일은 기본이고, 조상을 알 수 없어 노비 집안 출신이라는 험담까지 들어왔다.
주인공은 종친회가 나름 돈이 된다는 말을 듣고 곳곳에 흩어진 헌 씨들을 모은다.
그렇게 모인 헌 씨는 몇 안 되지만 출신은 입양아, 탈북자, 주부, 전직 조폭 출신 횟집 사장, 정치인, 교수 등 다양하다.
도무지 공통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이들이 모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니, 이야기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돼 재미를 준다.

이들은 노력 끝에 자기 뿌리가 진주에 닿아있음을 확인하고 '진주헌씨'를 자처한다.
하지만 겨우 만든 종친회는 전국문중협회가 주최한 행사에서 푸대접받고, 심지어 겨우 찾은 조상이 족보를 조작한 듯한 정황을 포착한다.
그 와중에 돈을 들고 잠적하는 주인공.
과연 '진주헌씨 종친회'의 운명은 어떻게 흘러갈까.

다시 말하지만, 이 작품은 코미디다.
헌봉달, 헌총각, 헌신자, 헌학문, 헌자식, 헌금함, 헌소리, 헌정치 등 임성한 드라마를 닮은 등장인물 이름부터 대놓고 코미디를 지향하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단순한 코미디에 그쳤다면 이 잡글을 끼적이지 않았을 테다.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좌충우돌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계급문화를 지적하고,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공동체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가벼우면서도 진지하다.
시대착오적인 소재를 역설적으로 잘 활용한 신선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