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과거의 어느 순간을 선명하게 재생하는 노래가 있다.
내게도 그런 노래가 꽤 있는데, 그중에서도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는 대부분 헤비메탈이다.
아껴 모은 용돈을 들고 음반 가게로 향하던 어느 여름날로 나를 이끄는 헬로윈의 'Eagle Fly Free', 같은 반 일진 때문에 괴로워서 홀로 음악에 기댔던 순간 위에 오버랩되는 사바티지의 'Believe', 그리고 교실 맨 뒷줄 구석 자리에 앉아 조용히 헤드뱅잉을 했던 야간자습 시간을 소환하는 주다스 프리스트의 'Painkiller'...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학교에 최소한 앨범 너댓 장을 들고 갔고, 그 앨범을 학교에서 다 들었다.
그중에서도 주다스 프리스트의 앨범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야간자습 시간을 버티게 해준 진통제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헤비메탈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고, 다시 돌아올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무대 위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머리를 흔드는 로커보다 헤드폰을 낀 채 턴테이블을 돌리는 DJ가 페스티벌에서도 더 환영받는 세상이니 말이다.
그런 세상에 헤비메탈 밴드의 전기라니, 그것도 번역서가 아니라 한국인 저자가 쓴 전기라니.
저자는 이 전설적인 밴드의 연대기를 다채로운 참고 자료를 바탕으로 개인적인 의견을 더해 친절하게 풀어놓는다.
이 책을 읽으며 오랜만에 주다스 프리스트의 모든 앨범을 정주행했다.
덕분에 20년 넘게 앨범을 들었으면서도 몰랐던 사실을 꽤 알게 됐고(특히 해퍼드의 연애사), 잘못 알고 있었던 부분도 수정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K. K. 다우닝에 관해선 내가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이 꽤 많았다.
나는 밴드의 원년 멤버인 그의 탈퇴를 갑작스럽게 여겼는데, 실은 갈등의 역사가 꽤 오래됐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멤버들의 과거와 밴드 결성 과정, 각 앨범 제작 당시 에피소드와 비하인드 스토리를 문장으로 훑는 사이에 [TURBO] 등 몇몇 앨범에 관한 네 평가가 바뀌기도 했다.
헤비메탈의 불모지에서, 팔리는 책만 팔리는 출판시장의 불모지에서 이 책은 단언컨대 출간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시도다.
음악을 모르고 읽어도 재미있는 책이다.
헤비메탈이라는 한 우물만 파서 정점에 올라 현재진행형인 전설적인 밴드의 역사.
모르는 사람의 성공담도 들으면 재미있는데, 이런 이야기가 재미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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