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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윤고은 장편소설 <불타는 작품>(은행나무)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3. 11. 11.

 

 



배달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무명 화가가 느닷 없이 자신을 후원하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제안한 곳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미국의 한 재단인데, 어이없게도 재단의 주인이 '로버트'라는 개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개다.
犬. DOG. 멍멍이.
'로버트'가 무명 화가의 그림을 '픽'했단다.
대신 조건은 하나, 지원받아 완성한 작품 중 하나를 소각해야 한다.
소각할 작품은 '로버트'가 정한다.
'로버트'가 '픽'해 작품을 소각 당한 작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로 발돋움하고, 해당 작가의 작품 가격은 큰 폭으로 뛰어오른다.
그런데 사람도 아닌 개의 안목이 정말 정확할까? 
개의 언어를 통역해 주는 사람과 기계가 있다지만, 작가와 개가 정말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 건가?
읽기 전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기상천외한 설정 아닌가?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예술이란 무엇이고, 예술가란 어떤 존재인가"가 되겠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소각하고 싶지 않아 저항하지만, 소각이라는 강렬한 퍼포먼스가 있어야 작품이 살아남고 작가의 위상도 올라가는 아이러니.
이런 아이러니 앞에서 작가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예술가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어디까지 타협할 수 있을까?
예술에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는 누구인가?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내 안에 여러 질문이 쌓였다.

처음엔 고작 개가 선택한 한 작품만 태우는 건데 어려울 게 뭔가 싶었는데, 마지막엔 작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작가가 존재하는 이유와 결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작가들끼리 모인 술자리의 이야기 주제가 신세 한탄으로 흐르는 경우는 많지만, 그 어떤 작가도 자신이 작가가 됐다는 사실을 후회하는 걸 본 일이 없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괴로워할 뿐이다. 
수입과 별개로 작가는 내가 지금까지 본 자기만족도가 가장 높은 직업이다.
얼마 전에 진행한 인터뷰에서 앞으로 작가로서 어떤 목표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때 나는 많이 안 팔려도 좋으니 '내'가 진심으로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하나라도 쓰고 싶다고 답했다.

아무리 대단한 지원을 받았어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들어 가는 작품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작가가 자존감을 지키는 게 가능할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명성을 누릴 수 있겠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얻은 명성이 무너진 자존감을 세울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있을까.
이 소설도 재단의 지원을 받아 유명해진 작가들이 이후 소각된 작품을 능가하는 새로운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자존감이 무너진 작가는 자신이 만족하는 작품을 내놓을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소설을 쓰는 작가 중에서 가장 많은 아이디어를 가진 작가를 한 명만 꼽으라면 윤 작가를 꼽겠다.
기막힌 상상력, 파격적인 설정, 심각한 상황을 심각하지 않게 표현하는 재기발랄함.
이 작품에서도 작가의 그런 장점이 빛나지만, 전작과 비교해 훨씬 철학적이다.
책을 덮을 때쯤에는 기상천외한 설정을 잊어버릴 정도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작품이다.
멋진 '예술 찬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