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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나재필 산문집 <나의 막노동 일지>(아를)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3. 11. 12.

 



30년 가까이 기자로 살아온 중년 남자가 준비 없이 사표를 던졌다.
평기자 시절에는 굵직한 기자상을 많이 받았고, 데스크를 거쳐 '기자의 꽃'이라고 불리는 편집국장 자리에도 앉아봤다.
사실상 떠밀리듯 낸 사표였지만, 살아오면서 나름 콧방귀를 뀌어봤으니 나오면 어떻게든 살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나이 든 청춘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용직 알바와 식당 주방보조를 전전하며 재취업을 시도한 끝에 도착한 곳은 막노동 현장이었다.

막노동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노동 형태이지만,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한민국 사회가 막노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기 때문일 테다.
이른바 '노가다'라고 불리는 막노동 현장은 마치 인생 막장인 사람들이 모인 곳 취급을 받아왔다.
이런 세간의 인식 때문에 막노동을 하는 사람이 자기 일을 누군가에게 대놓고 설명하는 경우가 드물다.

내 아버지도 그랬다.
아버지는 평생 막노동을 하셨는데, 내게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한 적이 없다.
나 또한 아버지가 현장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는 땀냄새와 술냄새를 짙게 풍길지언정 늘 옷만은 깔끔하게 갈아입고 귀가했다.
그 때문에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직업을 몰랐다.
그저 땀냄새와 술냄새가 유독 짙은 회사원이라고 여겼다.

최근 들어 출판시장에서 다양한 직업 산문집이 주목받고 있지만, 막노동을 본격적으로 다룬 산문집은 천현우 작가의 <쇳밥일지> 정도만 눈에 띌 뿐이다.
이 산문집은 흔하지만 지금까지 주제로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막노동을 다룬다는 점에서 귀중한 기록이다.
작가는 자신이 막노동을 바라보는 인식도 세간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반성하고, 막노동판에서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며 경험한 현실과 그 안에서 찾은 희망을 담담한 필치로 보여준다.

작가가 경험한 막노동 현장은 자기 일만 부지런히 하면 되고, 윗사람 눈치 볼 일도 없고, 승진 경쟁도 없고, 일한 대가가 정확하게 나오는 등 합리적인 공간이었다.
작가는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며, 막노동은 그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고 고백한다.
회사 부도 후 편의점 창업 자금을 모으는 중년 가장, 고향에서 식당을 개업할 준비를 하는 청년, 농한기를 맞아 놀지 않으려는 농부...
그들이야말로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페이지 곳곳에서 오랜 기자 경력이 빛을 발한다.
작가는 고용 형태에 따라 주어지는 업무와 권한, 임금 지급 체계, 불합리한 관행, 원청의 규모에 따라 달라지는 현장 분위기 등을 마치 르포 기사를 쓰듯 상세하게 묘사해 현실감을 더한다.
조선업 노동자 감소, '인분 아파트' 사건의 원인 등에 관한 분석에선 불편부당한 태도를 유지하려는 언론인의 자세가 엿보인다.

편견과 무례함은 대체로 무지에서 온다.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처지를 알고 이해하면, 쉽게 편견을 가지거나 무례해질 수가 없다.
이 산문집은 막노동 현장 르포이자 일자리 위기에 내몰려 돈 들어갈 곳은 많은데 돈 들어올 곳은 없는 중장년층의 현실을 보여주는 훌륭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이 산문집을 읽은 후에는 막노동 현장을 막장이라고 깎아내리거나 기성세대를 쉽게 꼰대라고 부르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한번 밑동이 잘린 나무는 이듬해 잘린 그루터기에서 곁가지들이 뻗친다. 곁가지가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곁가지에도 이파리는 돋아난다. 은퇴한 중장년들의 삶도 밑동이 잘린 나무나 다름없지만 생명력이 있기에 다시 곁가지를 뻗치고 이파리를 틔울 수 있다. 우리는 낡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워지고 있는 것이다.”(261페이지)

나는 이 산문집을 통해 아버지가 평생 경험해 온 현장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됐다.
술자리에서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졌다.
훌륭한 직업 산문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