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존감이 바닥을 쳤던 때가 몇 차례 있는데, 그중 첫 번째가 고등학교 시절이다.
국민학교와 중학교 시절의 나는 반에서 1등을 도맡아 하던 우등생이었고, 앞으로도 1등은 계속 내 몫일 줄 알았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해 치른 첫 시험에서 나는 생전 받아보지 못한 등수(반에서 10등 이하, 전교에서 100등 이하)를 받았다.
처음에는 그저 실수라고 여겼는데, 거듭된 시험을 통해 그게 내 본래 실력이라는 점만 더 확실해졌다.
고등학교 3년은 내가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매 시험을 통해 받아들여야 했던 시간이었다.
세상이라는 무대에 주인공의 들러리를 서고 싶은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들러리로 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당히 그렇다고 말하기는 또 겸연쩍다.
나 또한 고등학교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느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만약 내가 3수를 시도했을 때 들인 노력을 고등학교 시절에 했다면 3수를 할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돌이켜 보니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최소한의 최선'을 했던 것 같다.
그땐 그 정도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고 느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아홉 작품 속 등장인물은 대체로 그런 사람들이다.
매사에 기운이 넘치는 사람을 보면 부럽고 그들처럼 살고 싶지만, 타고난 성향을 억지로 바꾸기가 쉽지 않은 사람들.
작가는 평범하게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의 쓸쓸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를 통해 작가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몫만큼 '최소한의 최선'을 다한 평범한 사람들 때문에 주인공도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빛이 있으니 그림자도 있는 것 아니냐고, 그림자는 그림자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답답하면서도 안쓰럽고, 외면하고 싶은데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문득 오래전에 읽은 '용기'라는 제목의 동시가 이 소설집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충분히 할 수 있어/사람들이 말했습니다/용기를 내야 해/사람들이 말했습니다/그래서 나는 용기를/내었습니다/용기를 내서 이렇게/말했습니다/나는 못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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