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후기

배명훈 연작소설집 <화성과 나>(래빗홀)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3. 12. 8.

 



소싯적에 과학자를 꿈꾸며 <학생과학>이나 <과학동아> 같은 잡지를 열독했던 시절이 있었다.
과학 잡지답게 우주 탐사를 주제로 다룬 기사와 사진이 많이 실려 있었는데, 지금까지 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건 튜브에 담긴 우주식량을 짜 먹는 비행사의 모습이다.
식사하는 비행사의 표정이 딱히 즐거워 보이진 않았지만, 나는 그 맛이 정말 궁금해 미치는 줄 알았다.

지금이야 튜브 안의 내용물이 유동식일 테고, 지구에서 차려 먹는 음식보다 맛이 없다는 걸 충분히 짐작하지만, 어린 시절 내 눈에는 그저 맛있어 보였다.
이젠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음식은 식량보다 사료에 가깝다는 걸 알기에, 비행사들이 당시에 얼마나 고생했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요즘 우주비행사는 과거보다 음식다운 음식을 먹는 듯하지만, 잘 해봐야 동결건조 제품이나 통조림이더라.

매일 레토르트 식품을 먹는 상상만 해도 지겨운데, 먼 훗날 화성 탐사를 하게 될 우주비행사는 어떤 음식을 먹으며 생존하게 될까.
진정한 화성 거주는 정착한 인류가 지구에서처럼 평범한 일상을 보내게 될 때 가능하지 않을까.
이 연작소설집에 실린 여섯 단편은 그런 관점에 따라 화성에 정착한 인류의 삶을 현실적으로 그린다.

미래의 발달한 과학이나 과학기술을 다룬 전형적인 SF를 기대하고 읽는다면 지극히 지구다운 사건과 묘사에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화성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살인사건을 해결해야 하고(붉은 행성의 방식), 뜬금없이 간장게장을 먹고 싶어 고군분투하며(위대한 밥도둑),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사랑이 싹 트고(행성봉쇄령), 심지어 부동산 투기도 한다(나의 사랑 레드벨트).

이 연작소설집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쓸모없는 사람이 화성으로 건너가는 순간부터 문명이 완성된다(김조안과 함께하려면)는 작가의 관점이었다.
정착에 필요한 기술과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만 채워지면 100년이 지나도 사회가 완성되지 않으며, 쓸모없는 사람이 건너가 다음 단계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지 않고 당장 행복해질 궁리를 할 때 비로소 문명이 완성된다는 관점.
이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관점이었고, 대단히 설득력이 있었다.

과학 기술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려면, 그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하고 이에 대응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인문학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다.
내게 이 연작소설집은 먼 훗날 화성에 어떤 사회가 들어설 것인가를 예측하고 인문학적 관점에서 들여다본 훌륭한 보고서로 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