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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김혜나 중편소설 <그랑주떼>(은행나무)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4. 4. 14.

 

 



오래전 학창 시절은 내가 애매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괴로운 시간이었다.
키가 크지도 않았고, 잘 생기지도 않았고, 머리가 딱히 좋은 것도 아니고,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도 않았고, 성격도 내성적이고, 그렇다고 착하지도 않은.
악마는 악마인데 약한 악마?

나이가 들어 내가 애매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비로소 조금씩 자신에게 너그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애매한 나를 벗어나기 위한 전략은 틈새시장 찾기였다.
나는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경쟁자가 적은 곳에서 괜찮아 보이는 먹을거리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소설가로 사는 지금도 전략은 비슷해서 늘 아무도 쓰지 않지만 재미있어 보이는 소재를 찾는 데 공을 들인다.
그게 주변인으로 살아온 내가 그나마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전략이었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이 작품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섬세하면서도 담담한 발레 동작 묘사와 대비되는 주인공의 깊은 상처를 들여다보며 내 지난 시간도 다시금 곱씹어볼 수 있었다.
발레에 맞는 발을 가졌는데 춤을 추지는 못하는 주인공이 과거의 상처를 용기 내 마주하고 높이 날아오르며 춤을 추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누구도 과거를 바꿀 수 없다. 
과거를 되새김질하며 후회 속에 갇혀 살아가느냐, 아니면 과거를 경험이라고 부르며 앞날을 위한 발판으로 삼느냐라는 두 가지의 선택지만 주어질 뿐이다.
어렵지만 용기 내 후자를 선택한 사람에게 이 작품은 좋은 선물이 되어 줄 것이다.
책은 꽤 좋은 선물이다.
마침 선물하기에도 딱 좋은 옷을 입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