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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차무진 장편소설 <여우의 계절>(요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4. 4. 6.

 

 



이 작품의 배경은 학창 시절에 놀지만 않았다면 들어봤을 귀주대첩이다.
어지간한 소설 단행본 두 권 분량에 가까운 두께만 보고 읽기를 망설인다면 아쉬운 일이다.
호흡이 대단히 빠르고,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쉽게 가늠할 수 없어서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흥미진진하다.

귀주대첩을 다룬 콘텐츠를 통틀어서 가장 파격적인 작품이 아닐까 싶다.
'구국의 영웅' 강감찬을 무협지에 등장하는 정사지간(正邪之間)처럼 묘사했다는 자체부터 파격 아닌가.
페이지는 넘기는 내내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심지어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헷갈린다.
여기에 미스터리와 오컬트 요소까지 더해지니 소설이 어떻게 끝날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두가 아는 인물과 모두가 아는 사건으로 모두가 상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펼쳐내는 작가의 역량이 어마어마하다.
사료가 부족해 고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을 텐데도, 끌어모을 수 있는 사료는 다 끌어모아 적재적소에 소설의 기둥으로 세워 현실감을 높였다.
읽다 보면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놀라게 되는 부분이 많다.
더불어 살육 장면 묘사가 생생하고 잔혹해서 전쟁이 얼마나 슬프고 참혹한 일인지 잘 보여준다.
무협지처럼 과장되거나 낭만적으로 보이는 살육이 아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정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기분을 느꼈다.
귀주대첩을 단 몇 페이지로 쿨하게 넘겼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 작품이 어떤 성격의 소설인지 잘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이 출간됐을 무렵, KBS가 귀주대첩을 다룬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방송했다.
<고려거란전쟁>을 즐겁게 본 시청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작품은 드라마와 질적으로 비교 대상이 아니다.
드라마보다 새롭고 흥미로우며 훨씬 재미있다.
드라마를 방영하기 전에 출간됐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읽지 않은 사람은 그저 출간 시점만 보고 드라마에 편승했다는 오해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