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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고우리 산문집 『편집자의 사생활』(미디어샘)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4. 6. 26.



출판 시장에 넘쳐나는 게 산문집이라지만, 늘 새롭게 다가오는 종류의 산문집이 있다.
내겐 직업을 다룬 산문집이 그렇다.
나는 최선을 다해 자기 일을 하고, 그 일로 정직하게 밥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랑한다.
내겐 EBS '극한직업'이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감동적이다.
이 책은 책을 만드는 사람, 편집자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산문집의 내용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다.
이미 많은 리뷰가 있는 산문집이어서 거기에 비슷한 칭찬을 보태는 것보다 내 경험을 이야기하는 게 더 신선할 것 같다.

나는 신문기자로 11년 일했고, 그중 2년은 편집기자 경력이다.
편집기자는 신문 지면의 레이아웃을 짜고 제목을 단다.
제목을 잘 달면 대단하지 않은 기사인데도 잘 읽히고, 잘 못 달면 좋은 기사인데도 묻힌다.
편집기자가 생각하는 좋은 제목과 취재기자가 생각하는 좋은 제목이 다를 때가 종종 있다.
취재기자와 편집기자를 모두 경험해 본 결과, 이런 경우 대체로 편집기자의 의견이 옳다.
취재기자가 기사를 쓰지만, 편집기자가 오히려 그 기사를 더 잘 이해할 때가 많다.
취재기자는 해당 기사에만 매몰돼 있지만, 편집기자는 여러 기사의 맥락을 읽어낸 뒤 종합적인 판단을 통해 레이아웃을 짜고 제목을 달기 때문이다.
취재기자가 단 가제대로 제목을 다는 편집기자는 월급루팡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편집기자 경험이 나중에 취재기자로 일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
편집기자가 지은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때로는 편집기자의 마음을 읽어 나도 원하고 편집기자도 원할만한 제목을 먼저 제시할 때도 있었다.
그런 경험 때문일까?
나는 책을 만들 때 편집자에게 전권을 맡기고 편집자의 의견 대부분을 그대로 따르는 편이다.
그리고 내가 지은 가제가 실제 책의 제목이 된 경우도 꽤 많다.
장편소설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다시, 밸런타인데이』 『젠가』 『왓 어 원더풀 월드』, 소설집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 산문집 『안주잡설』 등은 모두 내가 가제로 지었던 제목이 그대로 출간 때까지 이어진 사례다.
편집자를 이해하면 작가도 편하다.

작가라면 누구든 편집자와 인연을 맺게 된다.
편집자를 향한 작가의 감정은 꽤 복잡하다.
고마울 때도 있지만 미울 때도 있고, 가깝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한없이 멀게 느껴질 때도 있다.
직업 산문집은 해당 직업 종사자를 이해하는 가장 빠르고 값싼 방법이다.
편집자가 밉고 멀게 느껴지는 작가라면 이 산문집을 일독해 보기를 권한다.
그 어떤 편집자도 자기가 만드는 책과 작가가 망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누구보다 책이 대박 나기를 바라는 사람이 편집자라는 사실을 이 산문집이 알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