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후기

박재영 산문집 <K를 팝니다>(난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4. 8. 5.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은 당대 고려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지만, 왕실 계보 서술이 엉망이고 고구려와 고려의 역사가 뒤섞여있는 등 오류가 적지 않다.
외국인이 외국인의 시각으로 쓴 책의 한계다.
오류 없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전달할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직접 외국의 언어로 우리를 설명하는 방법일 테다.

몰랐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출판된 한국 여행 관련 서적 중에 한국인이 쓴 책이 지금까지 단 한 권도 없었다는 사실을.
이 산문집은 '네이티브 코리안'이 외국인 독자를 대상으로 두고 영어로 쓴 첫 번째 한국 여행 서적이다.

어처구니없긴 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왜 그런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한국 작가 중에 유창한 영어 문장으로 책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한국의 출판사 중에서 영어로 쓰인 책을 출간할 곳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저자는 여러 책을 써서 출간한 작가임과 동시에, 여러 책을 번역한 경력을 가진 번역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과 한국어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다르지 않은가.
놀랍게도 이 책에는 역자의 이름이 따로 없다.
작가는 번역가를 찾는 대신 딥엘(DeepL)과 챗GPT 등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 새로운 길을 택했다.
기획부터 집필, 번역 과정까지 모두 기념비적인 책이다.

이 책은 꽤 두꺼운 편이어서(647페이지) 집어 들면 무기로 쓰기에 좋을 정도로 묵직한데, 막상 펼치면 읽기에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이 책은 한국어로 서술한 부분과 같은 내용을 영어로 서술한 부분을 20여 챕터에 걸쳐 번갈아 배치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한국어 부분만 읽으면 분량이 딱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다, 가독성도 매우 훌륭하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방대하고 자세한 여러 음식 설명이다.
작가가 도입부에 삼겹살을 가장 먼처 추천하는 이유와 한국인이 소주를 많이 마시는 이유에 관한 챕터를 배치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성격을 알만 하다.
맛집 설명도 구체적이어서 필동면옥, 우래옥, 나리의 집, 연타발, 화해당 등의 상호가 대놓고 나온다.
홍어, 낙지, 깻잎, 골뱅이 등 외국인에게 낯선 음식에 관한 서술 분량도 상당하다.
작가는 음식을 바탕으로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치맥과 한국의 야구 응원 문화를 연결해 설명하다가, IMF 외환위기와 한일 월드컵을 엮는 식이다.
물론 한국 최고의 야구 명문 구단은 두산 베어스라고 대놓고 팬심을 드러내는 부분은 그냥 '스킵'하면 된다.

아쉬운 부분이 없진 않다.
서울 바깥 지역에 관한 서술이 많이 부족하다.
심지어 몇몇 광역자치단체는 아예 서술조차 되지 않는다.
지나치게 음식 서술이 많다.
여행보다는 음식 가이드 같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도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를 단 하나만 꼽자면 재미다.
이 책은 대단히 재미있다.
한국인이라면 모두 알만 한 내용인데도 이를 재미있게 서술해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작가의 유머 감각이 탁월하다.
게다가 한국인이 읽어도 재미있고 새로운 내용이 많다.
한국인이 줄을 설 때 가깝게 붙는 이유를 좁은 국토와 연결 지어 설명하는 부분,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람에게 두부를 먹이는 이유에 관한 부분은 읽으며 무릎을 치게 만든 탁월한 분석이었다.
한국인 독자도 외국인 독자도 모두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