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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박서련 장편소설 『폐월; 초선전』(은행나무)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4. 7. 11.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 중 분량에 비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캐릭터는 '초선' 아닐까.
초선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는 판짜기가 없었다면, 『삼국지연의』는 꽤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테다.
초선은 남성 호르몬으로 가득 찬 『삼국지연의』의 초반을 주도하는 여성 캐릭터이지만, 이후 행적은 캐릭터의 무게감에 맞지 않게 묘연하다.

박서련 작가는 한국 문학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작가다.
등단한 지 10년이 안 됐는데, 그사이에 내놓은 단행본 수가 10개가 넘는다.
무시무시한 생산력이다.
그만큼 쓸 이야기도 많고, 관심사도 다양하다는 방증이다.
작가가 메가 임팩트만 남기고 빠르게 『삼국지연의』에서 퇴장한 초선에 주목한 건 우연이 아닐 테다. 

『삼국지연의』에서 초선은 사도 왕윤의 명을 받아 연환계를 펼쳤다고 나온다.
초선이 직접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긴 해도, 어디까지나 이 계책은 왕윤의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초선이라는 캐릭터를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살기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캐릭터로 새롭게 연출한다.
사극인데도 한반도에 존재했던 왕조가 아닌 중국의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다뤘다는 점도 매우 신선하다.
이런 시도는 학창 시절에 즐겨 읽었던 무협지 이후로 처음 본다.

이 작품 속 초선은 냉정해야 할 땐 망설이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며, 손에 넣기 어려운 높은 지위를 욕망하고, 성적인 욕망(그게 여자든 남자든)도 숨기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생존 그 자체에 특화된 캐릭터다.
주변인 모두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사라져도 초선만큼은 끝까지 살아남아 뒷이야기를 전한다.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 미녀'로 불리는 서시, 왕소군, 양귀비의 삶은 모두 비극으로 끝났다.
그런데 초선은 나머지 셋과 달리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가공인물이다.
마침 『삼국지연의』에는 연환계 이후 초선의 삶은 나오지 않으니 작가가 상상력을 더할 여지가 많았을 테다.
작품 마지막에 뒷이야기를 전하는 초선은 예상치 못한 모습이어서 파격적이었다.
그래서 대단히 인간적이었다.
스타일리시한 장편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