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지금까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 시대 쟁송제도, 그중에서도 민사소송에 해당하는 사송(詞訟) 절차를 실제 역사 속 사건과 엮어 흥미롭게 다룬다.
주인공은 '법꾸라지'가 판 함정 때문에 아버지가 화병으로 억울하게 죽자 규방 여인에서 약자를 돕는 남장여자 외지부(변호사)로 각성해 활약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 작품이 다루는 사건 모두 실제 역사에 기록된 사건이 바탕이다.
그 때문에 오래된 과거의 사건인데도 현장감이 상당하다.
죄가 있든 없든 일단 잡아들인 뒤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호통치며 주리를 틀고 인두로 지지는 '원님재판'이 사극이 묘사하는 사법절차의 클리셰다.
그러다 보니 근대 이전 한반도에서 법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학부 전공이 법학이어서 근대 이전 소송 절차에 관해서도 살짝 맛보기로 배웠는데, 그 절차가 현대 못지않게 정교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고려 초 '복수법'처럼 미친 법률이 시행된 흑역사가 있긴 하지만, 조선 시대는 전제군주제라는 한계 내에서 작동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사법절차가 작동했던 시대다.
무려 600년 전인 태종 6년(1406년) 6월 한 달에만 노비 문제로 낸 소장이 1만2797건이었다니, 그야말로 '소송의 민족'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 작품에서도 노비 소송은 큰 비중으로 다뤄지는 데다, 이야기를 질질 끌지 않는 덕분에 페이지 넘어가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주인공은 가능한 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지만, 필요할 땐 협박과 폭행 등 사적제재를 동원하는 등 '사이다'를 연출하기도 한다(이쯤 되면 '빈센조'의 순한 맛인가).
소설로서도 재미있지만, 당대 사법 절차를 엿보기에 훌륭한 참고 자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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