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 두 권을 출간한 경력이 있고, 내년에도 새로운 산문집을 낼 계획이다 보니, 산문집을 쓸 때 고충을 나름 안다.
어떤 산문집이든 주제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이 산문집의 주제는 술이다.
명확한 주제다.
주제가 명확할수록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의외로 쉽지 않더라.
주제에 관한 지식과 정보 제공이 앞서면 읽는 재미가 떨어지고, 지나치게 감상만 늘어놓으면 글이 느끼해져 소화하기가 버겁다.
그래서 이 산문집을 기대했다.
작가가 오랫동안 좋은 작품을 써 왔던 소설가이면서 동시에 술에 관해 조예가 깊은 프로페셔널(내눈에는 그렇다)이니까.
이런 교집합을 가진 작가는 내 데이터베이스에는 단 한 명뿐이다.
읽은 소감을 단 한 단어로 요약하면 '말모'다.
몰랐던 훌륭한 우리 술 위에 국내외 문학 명작이 절묘하게 엮이고 그 위에 작가의 삶이 슬그머니 겹친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득도한 부처를 다룬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소개하며 보리수 열매를 넣어 빚은 '보리수 헤는 밤'을 소개하는 식이다.
이청준의 단편 「눈길」의 한 장면을 언급하며 청주 '서설'을 소개하고, 그 위에 작가를 다룬 기사 하나하나를 스크랩하던 어머니의 마음이 아름답다.
그렇다고 지식과 정보 제공이 부족하지도 않다.
약주 '강쇠'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처구니없는 청주와 약주의 차이를 알게 된다.
충주 담을술공방 '주향소주'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옹기의 우수성을 알게 돼 괜히 어깨에 국뽕이 차오른다. 황순원의 소설 「독 짓는 늙은이」를 리마인드하는 과정은 덤이다.
탁주에서 단양주, 이양주, 삼양주의 차이를 이 산문집을 읽고 처음 알았다.
이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소개하는 우리 술이 다채롭다 보니 그중 하나쯤은 독자의 삶과도 직간접적으로 엮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고향에 멋진 청포도 와인 '264'가 있음을 이 산문집을 읽고 처음 알았다.
이 산문집이 아니었다면 아버지의 고향인 논산에 '여유소주'라는 훌륭한 증류주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테다.
안동 맹개마을 '진맥소주'를 소개할 땐 내가 속초에서 사랑하는 술집인 '아프리카'가 등장하고, 내 몇몇 장편소설을 마무리했던 제주 선흘리가 등장하고, '희양산 막걸리'를 소개할 땐 친애하는 최유안 작가가 등장하니 이쯤 되면 대놓고 책을 읽으며 친목질하는 기분까지 든다.
덕분에 맨정신으로 다채로운 술을 즐겁게 시음했다.
이 산문집은 사진이나 별점 하나 없지만, 우리 술을 다룬 그 어떤 가이드북보다 훌륭한 가이드북이다.
스토리텔링 마케팅만큼 강력하고 오래가는 마케팅도 드무니 말이다.
여기에 소개된 다양한 술과 양조장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술 하나쯤은 얻어걸릴 테다.
주류 시장에서 이 산문집에 꽤 민감하게 반응하리라고 예언해 보겠다.
작가는 '건축가가 빚은 막걸리'를 소개하며 소설가가 빚은 막걸리를 시중에 내놓는 상상을 한다.
그 상상이 잘하면 꼭 현실이 됐으면 좋겠다.
무슨 맛의 술이 만들어질지 궁금하다.
p.s. 작가가 순창 '지란지교' 탁주를 소개할 때 쑥스럽지만 내 이야기가 나오는데, 오류가 있어서 수정한다. 작가는 나를 불의를 보면 크게 분노하고 저항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틀렸다. 나는 불의를 보면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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