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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고다 아야 산문집 『나무』(책사람집)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5. 5. 1.

 

 



이 산문집은 작가가 말년에 일본 곳곳의 나무를 찾아다니며 배우고 느낀 감정을 섬세하게 담고 있다.
문장만 읽는데도 이끼 냄새, 죽은 나무가 삭는 냄새, 흙냄새가 생생하다. 
식물을 다룬 다른 산문집처럼 특정 종(種)의 나무가 아니라 특정 장소에 있는 나무를 다룬다는 점이 독특하다.
홋카이도 자연림에서 쓰러져 죽은 나무 위로 새롭게 자라난 가문비나무를 통해 생사와 윤회의 질서를 실감하고, 도쿄 근방의 등나무를 보며 딸을 향한 미안함을 되새기고, 혹독한 환경인 야쿠섬에 자라는 삼나무를 가난한 삶을 이기는 강인함을 엿보는 식이다. 

작가의 시선은 자기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넘어 그 나무를 지탱하는 자연과 인간으로 향한다.
작가가 바라본 나무의 삶은 인간 이상으로 치열하고 복잡하다.
조금 더 햇볕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권력의 공백을 놓치지 않는다.
동시에 홀로 우뚝 설 수는 없고 함께 있어야 비바람을 버틸 수 있다.
뒤틀린 나무가 톱날에 반항하다가 끝내 폭발하듯 부서지는 걸 보며,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인간의 고집을 읽는다.
작가는 업혀서라도 나무를 보려는 등 지나치게 고집을 부리는데, 그 고집에서 남은 생이 길지 않아 살아있을 때 나무를 느끼려는 조바심과 간절함이 느껴져 애절하다. 
 
지난 2003년 봄에 길을 걷다가 우연히 한 들꽃을 만났다.
겨우내 삭은 낙엽을 뚫고 올라온 작은 들꽃 한 송이의 하늘색 꽃잎.
그 들꽃의 이름을 알고 싶어 서점에 들러 식물도감을 뒤졌다.
쌍떡잎식물 용담목 용담과의 두해살이풀, 이름은 구슬봉이. 
다시 그 꽃을 보고 싶어 찾아갔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구슬봉이 주위에 피어 있던 냉이꽃, 꽃다지, 봄맞이꽃, 꽃마리 등 다양한 들꽃을 발견한 것이다.
그 순간 무채색의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바뀌었다.
들꽃은 내게 계절과 시간을 가늠하는 기준이며, 동시에 이 세상이 살만하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매개이기도 하다.
구슬봉이는 내 들꽃 사랑의 시작이었다.

이 산문집을 읽으며 그때의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는 이런 산문집 한 권을 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