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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이석원 산문집 『슬픔의 모양』(김영사)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5. 5. 3.

 



내 취향은 아니지만 정말 글을 잘 쓴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작가가 몇 명 있다.
이석원 작가도 그런 작가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스토커도 아닌데 꼬박꼬박 작가의 책을 챙겨 읽고 있고, 그럴 때마다 "참 잘 쓰는데 내 취향은 아냐"라고 투덜거리며 책을 덮곤 한다.
그런데 이 산문집은 잘 쓴 책을 넘어 심지어 내 취향이기까지 했다.
저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작가가 지금까지 쓴 모든 단행본 중 최고작이라는 게 내 의견이다.

이 산문집은 작가의 아버지가 코로나 펜데믹 당시 쓰러져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급박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버지는 이제 가족을 돌보는 대상이 아니라, 온 가족이 돌봐야 하는 존재로 바뀐다.
그날부터 작가뿐만 아니라 어머니, 두 명의 누나의 일상도 급격한 지형 변화를 겪는다.

가족이란 관계가 그렇지 않던가.
누구보다 가까우면서도 어쩔 땐 누구보다 먼.
마음만큼 가까워지거나 멀어질 수도 없는 존재.
이 산문집 속 "내게 가족이란 늘 행복한 지옥이거나 지옥 같은 천국 둘 중 하나였다. 내가 아는 한 한 번도 중간은 없었다”라는 문장은 가족이란 존재를 설명하는 훌륭한 문장이다.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 이후 벌어진 모든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며 느꼈던 감정이 이 산문집을 읽으며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작가의 아버지는 지금 기준은 물론 오래전 기준으로 봐도 좋은 아버지라고 부르긴 어렵다.
밖에선 호인이지만 안에선 고집불통이고, 작가에게 평생 다정한 말 한마디는커녕 스킨십조차 없던 사람이다.
작가는 그런 아버지가 생사의 고비를 오갈 때마다 가슴 아파하며 애절한 마음을 드러내면서도, 상태가 좋아진 아버지가 예전 같은 모습을 보여주면 견디지 못하고 원망한다.
그야말로 애증 그 자체인 관계다.
"부모는 언제나 우리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교훈을 준다. 나는 저렇게 살아야지.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라는 문장을 읽고 사무쳤다.

남은 가족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병간호 때문에 점점 예민해져 서로를 물어뜯다가도,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사불란하게 뭉쳐 일을 해결한다.
그런 작가의 가족을 지켜보며, 저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행동했겠느냐는 질문을 내게 수시로 던졌다.
이 산문집을 읽는다고 해서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마음이 크게 바뀌진 않을 테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가족이란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는 명언(?)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래도 이 산문집을 읽으면 가족을 미워하는 마음에 살짝 균열이 생길 거라고 확신한다.
무엇보다도 재미있고(내용은 다급한데 참..)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흥미진진하다.

P.S. 이 산문집의 결말이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땐 전혀 예상치 못했던 형태여서 놀랐다. 기분이 복잡했다. 가족이란 늘 행복한 지옥이거나 지옥 같은 천국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