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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단요 장편소설 『피와 기름』(래빗홀)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5. 5. 23.

 



제동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기차가 선로 위를 달리고 있다.
선로 위에는 다섯 사람이 있다.
선로를 바꾸지 않으면 그들은 죽는다.
선로를 바꾸면 그들은 살지만, 바뀐 선로에 있는 사람 한 명은 죽는다.
당신 앞에 선로를 바꾸는 손잡이가 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텐가?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과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윤리 관점에서 바라본 '트롤리 딜레마'다.

비슷한 문제를 내보겠다.
눈앞에 보이는 소수를 살리기 위해 전 인류를 지옥에 살도록 내버려두는 게 옳은 일인가.
당신에게 세상을 끝낼 수 있는 권능이 있다면 그 권능을 어떻게 사용할 텐가.
이 문제를 신학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내면 어떤 결론을 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중요한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에 "버리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어서 굴러가는 게 세상"이라고 대답했다.
다른 독자의 대답이 궁금하다.
정답은 없다.

대단히 지적이고 도발적이다.
읽는 내내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끼긴 오랜만이었다.
신학을 비롯해 철학, 역사 등 다양한 학문 분야의 깊은 지식을 무기로 쉽게 답할 수 없는(하지만 필요한) 여러 무거운 질문을 쏟아내며 독자를 코너로 몬다.
동시에 서사는 액션 영화 못지않게 흥미진진하다.
박상륭 작가의 소설을 읽기 쉽게 쓰면(그래도 어렵다)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절대로 쓰지 못할 내공을 가진 소설이다.

고백하자면 작품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이해하길 포기하고 이야기의 흐름만 따라갔다.
어쩌면 내가 훗날에 천재 소리를 들을지도 모를 작가를 마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전율이 일었다.
특정 종교 신자는 이 작품에 불쾌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올해 읽게 될 소설 중에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할 소설이 더 있을지 모르겠다.
그만큼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