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대표작이자 데뷔작인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를 읽고 느꼈던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이고, 익숙한데 낯설며, 웃기면서도 슬프고, 경쾌하나 우울한...
어렵지만 형용사 하나로 그때 느낀 기분을 요약하자면 '명랑하다' 정도 되겠다.
돌아서서 생각해 보면 심각한 이야기인데도, 읽고 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작품의 모음이었다.
경험하지 못하면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나로서는 다채로운 상상력이 정말 부러운 작가다.
국내 작가 중에서 이 정도로 다채로운 상상력을 읽기 쉬운 문장으로 풀어내는 작가가 더 있을까 싶다.
이 소설집을 읽고 느낀 감정은 데뷔작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슬픔과 우울함의 농도가 조금 짙어졌다고 해야 하나.
이 소설집에 담긴 여덟 작품 대부분이 이별이나 죽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을 절망적이지 않게 보여주는 데 탁월하다 보니, 그런 기분에 깊게 빠져들 새도 없이 웃어넘기게 하는 매력이 있다.
지독한 상황인데도 지독한 문장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종종 낭만적으로 느껴질 때도 많았다.
당황스럽지만 말이다.
이별과 죽음을 다룬 이야기와 '명랑하다'는 형용사는 내겐 양립하기 어려운 단어인데, 이 소설집에선 어처구니없이 부드럽게 가능해진다.
가볍지만 무겁다는 표현도 이 소설집에선 가능하다.
SF나 판타지 요소가 자주 쓰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도피나 정신 승리는 아니다.
억지스러운 해피엔딩은 없다.
오히려 사태를 똑바로 파악하고 자기 객관화를 하는 메타인지에 가깝다.
이별 뒤에 남는 존재는 나뿐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다시 운동화 끈을 고쳐 맨 뒤 일상을 다시 시작하는 방식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말하는 스칼렛 오하라처럼.
담백하면서도 아름답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참 좋았던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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