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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임지형 장편소설 『연희동 러너』(상상스퀘어)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6. 8. 8.

 



7612번 연두색 버스, 홍남교 정류장, GS편의점, 서대문구행복그린센터, 그리고 홍제천 등 눈에 익은 지명들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지난해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석 달을 머물며 매일같이 스쳐 지나갔던 익숙한 공간들이라 글을 읽는 내내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어찼다. 소설 속 주인공 연희는 타인과의 비교 속에 조급해하고 불안해하다가, 우연히 시작한 달리기를 통해 비로소 나만의 호흡과 속도를 찾아간다. 이 소설의 연희처럼 온몸을 던져 달리기까지는 아니었지만, 20대 말 여러 이유로 방황하고 불안했던 내게도 청계천을 걷는 시간이 유일한 안식처이자 치유였다.

당시 나는 며칠 동안 잠에 들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몸을 미치도록 피곤하게 만들면 까무러치듯 잠에 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절박함에, 살던 고시원에서 무작정 나와 가까운 청계천 물길을 따라 걸었다. 늦은 밤 오가는 이 하나 없는 고요한 청계천을 홀로 걷는 일은, 삭막한 현실을 벗어나 오롯이 나만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듯한 자유로움을 안겨주었다. 처음에는 어둠을 피해 조급히 내딛던 발걸음이 점차 규칙적인 리듬을 찾으면서 내동댕이쳐졌던 마음의 소음도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걷는 거리는 날이 갈수록 점점 늘어나, 중랑천 합류 지점부터 물길이 시작되는 광화문까지 왕복하는 일조차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밤낮없이 길 위에 내던진 시간 속에서 마침내 나를 괴롭히던 불면증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어 무언가에 몰입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자, 내 안에는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다는 묘한 자존감이 생겼다. 그 힘으로 고향인 대전까지 무작정 걸어가 보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수없이 발바닥을 내딛는 그 길 위에서 나는 오직 내 호흡과 발자국 소리에만 집중하는 법을 배웠다. 소설 속 연희가 홍제천을 달리며 온전히 자신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듯, 그 시절의 나 역시 걸음을 통해 불안이라는 어둠을 물리치고 있었던 셈이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그 청량했던 밤공기와 땀방울의 감각이 떠올라 소설 속 장면에 깊게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을 읽는 일만으로도 마치 새벽길을 한 바퀴 크게 뛰고 온 것처럼 가슴속까지 상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타인의 기준에 쫓겨 조급해할 필요 없이, 그저 내가 발을 내딛는 바로 이 순간과 나만의 리듬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 이야기였다. "몸에도 좋고 마음에도 좋은 소설"이라는 장강명 작가의 추천사는 과장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