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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기사 및 현장/앨범 리뷰

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 해주세요]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2. 10. 27.

앨범 재킷만 보고 구석에 앨범을 처박아뒀던 지난 8월 즈음의 나를 꾸짖으며 기사를 끼적이다.

 

 

홍대 여신들은 왜 ‘오래된’ 소녀들을 이야기해야만 했던 걸까?…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 해주세요’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옛날 옛날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할머니의 할머니 아득한 먼 곳의 이야기. 실제로 있었던 일이란다…”(한희정 ‘이 노래를 부탁해’ 中)

‘홍대’, ‘음악 하는 여자’ 외엔 교집합을 찾기 힘든 열다섯 아티스트들이 옛날이야기 하나를 노래하기 위해 정류장으로 모여들었다. 저마다 일정도 장르도 다른 이들이 한데 모여든 정류장의 이름은 ‘이야기 해주세요’. 이들은 역사의 한 잔혹하고 파렴치한 자리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놓여 사정없이 물어 뜯겼던 ‘오래된’ 소녀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전한다. 누군가에겐 잊고 싶은 ‘과거’일뿐이지만 누군가에겐 여전히 가슴을 옥죄어 오는 ‘현실’인 이야기, 바로 ‘위안부’다.

두 장의 CD에 실린 열여섯 곡은 참여한 아티스트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채롭다. 첫 번째 하늘색 CD엔 한희정, 정민아, 오지은, 소히, 이상은, 지현, 무키무키만만수, 시와의 곡이, 두 번째 흰색 CD엔 투명, 황보령, 송은지, 남상아, 강허달림, 트램폴린(Trampauline), 휘루의 곡이 담겨 있다. 포크, 일렉트로닉, 하드록 등 개성 강한 다양한 장르의 곡들은 단단한 주제의식으로 엮여 마치 하나의 노래처럼 물 흐르듯 이어진다.



수록곡들은 하나 같이 비극을 비극으로 노래하지 않아 더욱 비감이 어려 있다. 담담한 어조로 망각을 일깨우며 앨범의 문을 여는 ‘이 노래를 부탁해’(한희정)부터 소녀들이 꿈꿨을 소박한 삶을 노래한 ‘작고 작게’(정민아), 경쾌한 멜로디로 소녀들을 향해 ‘못 된’ 손길을 뻗쳤던 자들에게 역지사지를 바라는 ‘심증’(소히), 유린당한 소녀의 미래에 대해 침묵했던 세상을 향한 독백인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네’(시와), 일상의 풍경에 더 이상 자연스럽게 섞일 수 없게 된 상처 입은 소녀의 슬픔을 묘사한 ‘달팽이의 집’(송은지), 가해자의 시점에서 반성 없는 현실을 꼬집는 ‘내 이름은 닌자 영’(트램폴린) 등의 곡을 통해 ‘홍대’의 ‘음악 하는 여자’들은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오래된’ 소녀들을 위로함과 동시에 그들의 모질고 질긴 삶에 대한 망각을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이 앨범은 지난 8월에 발매됐다. 그 사이에 발매된 숱한 새로운 앨범들을 뒤로하고 기자가 이 앨범에 대한 무언가를 끼적이는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다. 핑계를 대자면 당시에 갓 가요를 담당하게 된 기자는 ‘홍대’의 ‘음악 하는 여자’들이 지난 4월 이 앨범 제작비를 후원받기 위한 공연을 펼친 사실도 몰랐다. 게다가 디자인이라고 할 것도 없는 밋밋한 앨범 재킷은 내용물에 대한 호기심을 떨어뜨렸다. 이 앨범을 듣게 된 것은 발매 후 두어 달쯤 흐른 후였다. 그것도 의무감으로 밀린 앨범을 정리하던 중 듣게 됐다. 참으로 죄스러운 일이다.

2012년 10월 27일 전국에 강풍을 동반한 비가 내리고 있다. 서울 일본 대사관 앞 소녀의 머리위에도 비가 내린다. ‘오래된’ 소녀들의 곱던 손등은 나뭇등걸처럼 변해 저승꽃이 핀지 오래다. 사실 관계를 온 몸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 노래를 부탁해. 끊이지 않는 비극 너와 나의 무관심을 노래해 줘. 이 노래를 부탁해. 침묵으로 얻은 평화 또 망각을 위한 망각을 노래해줘.”(한희정 ‘이 노래를 부탁해’ 中)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