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추천72 김하율 장편소설 <나를 구독해줘>(폴앤니나) 청년 서사는 대체로 우울하게 그려지는 편이다. 취업률을 비롯해 청년을 둘러싼 각종 현실 지표가 우울한 게 사실이고, 우울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힘들고 슬플 때 웃는 자가 일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만큼 어려우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거다. 이 작품은 청년 세대의 우울한 현실을 보여주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슷한 주제를 다룬 기존 작품과 차별성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연이어 공무원 시험에서 낙방한 뒤 나이 서른에 강제로 독립을 당한 여성이다. 늦은 나이에 명동의 화장품 매장에 취업한 주인공은 어린 시절부터 '불알친구'인 남사친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와 한국어까지 잘하는 조선족 직원 사이에서 유일한 한국인 직원은 언제 매장에서 잘릴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고객 대.. 2021. 12. 8. 최양선 장편소설 <세대주 오영선>(사계절) 읽는 내내 내가 주인공이 된 듯 숨이 막혔다. 반지하부터 창 없는 고시원을 전전하던 시절, 홀로 부동산 이곳저곳을 돌며 전세를 알아보던 시절, 전세 보증금 반환을 놓고 집주인과 싸웠던 사건, 하자를 놓고 부동산 중개인과 시비를 벌였던 일 등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 작품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인 부동산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20대 후반 여성을 중심으로 내 집 마련을 하지 못한 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준 베이비부머 세대 부모, 열심히 일하며 저축하면 좋은 날이 온다는 부모의 말을 믿은 청년 세대가 겪는 답답한 현실을 정밀하게 들여다본다. 내가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서 부동산.. 2021. 12. 6. 이유리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문학과지성사) 나는 이 소설집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칡을 떠올렸다. 첫맛은 쓰지만, 씹을수록 혀 위에 은은한 단맛이 감도는 칡. 온갖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난무하는 이 소설집에는 이런 뜬금없는 감상을 남기는 게 어울려 보인다. 오른손이 브로콜리로 변한 남자친구,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이구아나, 말하는 돌멩이, 화분이 된 아버지, 반투명인간이 된 자신 등... 이 소설집에는 밑도 끝도 없이 황당한 설정이 뻔뻔하게 등장하는데, 등장인물 모두 이를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어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웃기고 허무맹랑한데 묘하게 현실적이다. 그런데 이 소설집이 그저 웃픈 이야기 모음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문장 곳곳에 깃든 온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의 등장인물은 모두 마음에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 2021. 12. 3. 김초엽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한겨레출판)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을 손꼽아 기다렸다. 첫 번째 소설집 이 보여준 서정적인 상상의 세계(언젠가 나는 이를 '심장을 가진 SF'라고 표현했다)에 매료된 독자라면 다들 비슷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독자뿐만이 아니다. 문학동네, 문학과사회 등 각 단편이 실렸던 지면을 밝힌 마지막 페이지를 보면 작가가 기성 문단에서도 얼마나 환영받는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이번 소설집은 전작처럼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주제 의식에 통일감을 갖춘 게 특징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장애를 작품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변주해 다뤄왔다. 언어 대신 후각으로 소통하고, 기술로 감각을 느끼는 영역을 확장하는 등 작품 속에서 작가는 장애를 결함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감각하는 방식으로 바라본다. 신체 일부의 장애는 다른 신체의 감각.. 2021. 11. 30. 이전 1 ··· 9 10 11 12 13 14 15 ··· 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