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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설66

이유리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문학과지성사) 나는 이 소설집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칡을 떠올렸다. 첫맛은 쓰지만, 씹을수록 혀 위에 은은한 단맛이 감도는 칡. 온갖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난무하는 이 소설집에는 이런 뜬금없는 감상을 남기는 게 어울려 보인다. 오른손이 브로콜리로 변한 남자친구,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이구아나, 말하는 돌멩이, 화분이 된 아버지, 반투명인간이 된 자신 등... 이 소설집에는 밑도 끝도 없이 황당한 설정이 뻔뻔하게 등장하는데, 등장인물 모두 이를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어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웃기고 허무맹랑한데 묘하게 현실적이다. 그런데 이 소설집이 그저 웃픈 이야기 모음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문장 곳곳에 깃든 온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의 등장인물은 모두 마음에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 2021. 12. 3.
김초엽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한겨레출판)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을 손꼽아 기다렸다. 첫 번째 소설집 이 보여준 서정적인 상상의 세계(언젠가 나는 이를 '심장을 가진 SF'라고 표현했다)에 매료된 독자라면 다들 비슷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독자뿐만이 아니다. 문학동네, 문학과사회 등 각 단편이 실렸던 지면을 밝힌 마지막 페이지를 보면 작가가 기성 문단에서도 얼마나 환영받는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이번 소설집은 전작처럼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주제 의식에 통일감을 갖춘 게 특징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장애를 작품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변주해 다뤄왔다. 언어 대신 후각으로 소통하고, 기술로 감각을 느끼는 영역을 확장하는 등 작품 속에서 작가는 장애를 결함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감각하는 방식으로 바라본다. 신체 일부의 장애는 다른 신체의 감각.. 2021. 11. 30.
천선란 장편소설 <나인>(창비) 분량이 상당하지만 쑥쑥 읽히는 페이지터너여서 분량을 느끼기 어려웠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품은 풍경이 눈앞에 그려져 즐거웠다. 들꽃 덕후인 내게 작품 전면에 등장하는 식물 묘사는 무척 흥미로웠다. 식물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은 나도 자주 해봤으니 말이다. 이 작품을 한 장르로 구분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전공인 SF이기도 하고, 스릴러이기도 하고, 학원물이기도 하며, 성장물이기도 하다. 작가는 전작인 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로 세상의 부조리를 들여다봤는데, 이 작품에서도 인간이 아닌 존재(핵심 내용이어서 스포하지 않겠다)로 세상의 부조리를 꼬집는다. 작가는 청소년인 여러 등장인물의 눈으로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 2021. 11. 25.
박상영 장편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문학동네) 내가 새 장편소설 집필을 위해 속초에서 한 달 동안 머물고 돌아온 뒤 가장 먼저 펼친 책이다. 박상영 작가는 데뷔 때부터 민감하면서도 무거운 소재인 퀴어 서사를 유쾌하면서도 감각적으로 풀어내며 주목을 받아왔다. 나는 2년 전 문화일보 신춘문예 업무를 맡았을 때 퀴어 서사를 다룬 많은 응모작을 접수하며 작가의 영향력을 실감했다. 그만큼 작가의 첫 장편소설을 향한 기대감이 컸다 작가의 전작이 많은 독자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이유는, 성소수자의 사랑 속에서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을 끌어내는 과정이 신선하고 설득력 있게 느껴졌기 때문이 아닐까. 이 작품에서도 그런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대단히 재미있다. 작가가 묘사하는 2000년대 초반의 학창시절은 내 경험한 90년대 중후반의 학창시절과 상당히.. 2021. 1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