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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27

김숨 장편소설 <떠도는 땅>(은행나무) 참담한 장면의 연속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탄식했다. 동시에 뿌리내릴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삶을 이어가는 인간의 완강한 생명력이 눈물겨웠다. 이 작품은 1937년 소련에서 벌어진 고려인 강제 이주를 다룬다. 소련은 연해주 일대 일본의 간첩 활동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내몰았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가족으로부터 흩어지거나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막처럼 척박한 땅을 개척하며 겨우 생존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대강 알고 있는 고려인 강제 이주에 관한 역사다. 작가는 고려인들을 싣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화물열차 한 칸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배경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비참한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마치 끝없이 이어지는 긴 .. 2021. 3. 26.
파올로 조르다노 저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은행나무)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가 10만 명이 되지 않았던 시절에 쓰였지만, 지금도 곱씹어 읽어야 할 부분이 많은 책이었다. 어려운 비유 없이 심각한 사안을 설명해주고, 이와 동시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일례로 저자는 75억 인류를 구슬에 빗대 확진자가 어느 순간 급증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구슬 하나가 안정적으로 모여 있는 75억 개 구슬 중 하나와 전속력으로 부딪힌다. 부딪힌 구슬이 다른 두 구슬에 부딪히면, 두 구슬은 튕겨 나가 각각 다른 두 구슬과 거듭 부딪힌다. 이 같은 현상이 걷잡을 수 없이 반복되면서 75억 개 구슬 전체가 흔들리는 건 금방이다. 이미 다양한 뉴스를 접해 아는 내용인데도 사태의 심각성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문득 숫자 2가 몇 번 거듭제곱해야 인류의 숫.. 2021. 2. 17.
김다은 저 <영감의 글쓰기>(무블출판사)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영감을 어디에서 얻느냐?"이다. 소설 쓰기에 관심을 가진 지인뿐만 아니라 언론사와 인터뷰할 때도 이런 질문이 빠지는 일이 없다. 그 질문에 나는 할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나는 쓰고 싶은 소설의 주제를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 동안 생각하며 정리한 뒤 짧은 기간에 글로 쏟아내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이 과정에 딱히 영감이란 게 내게 영향을 미친 일은 없었다. 내겐 소설 쓰기가 정신노동보다는 육체노동에 가깝게 느껴진다. 고백하건대, 나는 다른 작가들이 어떻게 소설의 영감을 얻는지 무척 궁금한 사람이다. 나도 영감이란 걸 받아서 소설을 쓰는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 이 책을 펼쳤다. 작가가 최근에 쓴 장편소설 (은행나무)을 읽었을 때 왠지 모를 영성.. 2021. 1. 31.
정지돈 장편소설 <모든 것은 영원했다>(문학과지성사)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읽는 소설은, 나와 같은 시대를 사는 또래 한국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문학을 공부하지도 않았고 문우도 따로 없는 내게, 그들의 생각과 관심사를 엿볼 방법은 그들의 결과물을 읽는 일뿐이니 말이다. 그들의 작품을 바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고, 뒤늦게 이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정지돈 작가의 작품은 내가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에 놓인 작품이었다. 문학기자 시절에 (현대문학)를 비롯해 작가의 전작을 몇 권 읽었지만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약간은 오기로 신작을 샀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작가의 인터뷰가 실린 2021년 1·2월호까지 따로 챙겨 읽었다. 이 작품은 자신의 의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2021. 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