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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김숨 장편소설 <떠도는 땅>(은행나무)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1. 3. 26.

 



참담한 장면의 연속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탄식했다.
동시에 뿌리내릴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삶을 이어가는 인간의 완강한 생명력이 눈물겨웠다. 

이 작품은 1937년 소련에서 벌어진 고려인 강제 이주를 다룬다. 
소련은 연해주 일대 일본의 간첩 활동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내몰았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가족으로부터 흩어지거나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막처럼 척박한 땅을 개척하며 겨우 생존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대강 알고 있는 고려인 강제 이주에 관한 역사다.

작가는 고려인들을 싣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화물열차 한 칸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배경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비참한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마치 끝없이 이어지는 긴 노래를 듣는 기분을 느꼈다.
이 소설은 독특하게도 등장인물 저마다의 목소리가 설명이나 묘사를 대신한다.
누구인지 분명한 목소리와 누구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목소리가 좁은 공간에서 뒤섞여 돌림노래처럼 울린다.
저마다 다른 사연을 담은 목소리들이 뭉쳐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고려인의 이주 역사가 한 덩어리를 이룬다.
기본적인 생리 현상조차 해결할 수 없는 좁은 공간에 갇혀 영문도 모른 채 낯선 동토를 떠돌며 벌이는 슬픈 굿판.
지금까지 접해본 적 없는 독특한 연출에 전율했다.

마지막 장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황무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곳에 뿌리를 내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 속에서 생과 사가 이어지는 모습이 무심한 시선으로 교차하는데, 독자는 결코 무심해질 수 없다.
비참한 역사를 특정 이념에 기대는 대신,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보편적인 질문으로 풀어낸 연출이 소설에 울림과 깊이를 더한다.

역사의 공백을 이렇게 메울 수도 있구나...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