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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소설84

박문구 장편소설 <강릉, 겨울 그림자>(북인) 읽는 내내 술 냄새가 진동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강원도의 허름한 바닷가 술집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은퇴 후 노년으로 접어든 주인공이 그의 생을 잘 아는 미스테리한 청년과 예고 없이 술집에서 만나 나누는 대화가 이 작품을 이끄는 물줄기다. 물줄기는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고, 청년은 연대기 순으로 주인공의 생을 흔들었던 사건에 닻을 내린다. 이를 통해 주인공이 생존이라는 핑계로 묻어뒀던 아픈 기억과 시대상이 선명하게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와 직면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를 빌릴 가장 쉬운 방법은 술 아니겠나. 깨어나면 후회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이 작품의 전면에 흐르는 정서는 변방의식과 회한이다. 대한민국 인구 절반이 수도권에 거주한다. 수도권 과밀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 2023. 1. 8.
서동원 장편소설 <달 드링크 서점>(문학수첩)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만약 그때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이 작품에 실린 여덟 개의 에피소드가 다양한 형태로 이야기를 변주하며 던지는 질문이다. 이 작품은 처럼 옴니버스 형식으로 생활 밀착형 이야기를 전개한다. 완전한 허구의 장소를 배경으로 다루는 과 달리, 처럼 어딘가에 있을 법한 장소를 배경으로 다뤄 현실감을 높인다는 게 이 작품의 개성이다. 에피소드 전체에 작품을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인 바텐더 '문'과 달 토끼 '보름'의 로맨스가 드러날 듯 말듯 은은하게 깔려 있어 이를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자신의 실수로 벌어진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사람, 성공만 보고 달리다가 연인을 놓친 사람, 밥벌이에 매달리다가 꿈을 잊은 사람 등. 이 작.. 2023. 1. 6.
고호 장편소설 <노비종친회>(델피노) 근엄한 단어인 '종친회'에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노비'라니. 오로지 제목 하나에 끌려 집어 든 작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서 읽고 후회하지 않았다. 한국 소설에선 드문 따뜻하고 유쾌한 코미디물이었다.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희성인 헌 씨들이 모여 종친회를 만들고 뿌리를 찾는 이야기'다. 주인공을 비롯해 이 작품에 등장하는 헌 씨들은 소싯적부터 설움을 많이 받아왔다. '현' 씨로 오해받는 일은 기본이고, 조상을 알 수 없어 노비 집안 출신이라는 험담까지 들어왔다. 주인공은 종친회가 나름 돈이 된다는 말을 듣고 곳곳에 흩어진 헌 씨들을 모은다. 그렇게 모인 헌 씨는 몇 안 되지만 출신은 입양아, 탈북자, 주부, 전직 조폭 출신 횟집 사장, 정치인, 교수 등 다양하다. 도무지 공통점이라고는 .. 2022. 10. 7.
차무진 소설집 <아폴론 저축은행>(요다) 내 경험상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등장인물을 극한 상황에 몰아넣는 것이다. 극한 상황에 놓인 등장인물은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에서 등장인물은 종종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멋대로 움직이는데, 그럴 때는 그 뒤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꽤 흥미로운 결과물이 나온다. 등장인물이 맞닥뜨릴 수 있는 최고의 극한 상황은 어떤 상황일까. 정답은 정해져 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상황보다 극한인 상황이 또 있겠는가. 이 소설집에 실린 여덟 단편은 문학의 영원한 화두인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설화, 도시괴담, 역사, 고전과 엮어 다채롭게 변주한다. 가족물인 줄 알았는데 심령물로 반전하고, 사극인 줄 알았는데 SF가 끼어들더니, 동화의 한 장면이 고어물로 돌변한다. .. 2022. 10.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