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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소설84

김의경 장편소설 <헬로 베이비>(은행나무) 소설을 읽는 일이 다른 인생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가성비가 좋은 방법이란 걸 실감하게 해준 작품이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여성의 임신을 주제로 다룬 작품이다. 더 나아가 보자면 임신이라는 공통 분모로 여성이 연대하고 서로 위로하는 이야기라고 짐작해 볼 수도 있겠다. 이 작품을 다룬 기사도 대부분 그런 논조였지만, 책을 덮은 뒤 감상은 "글쎄?"다. 책을 덮은 뒤 느낀 기분은 복잡했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 우리가 과연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모두 난임 여성이다. 이들의 직업은 프리랜서 기자, 변호사, 수의사, 경찰, 가정주부 등 다양하다. 평소에는 서로 만날 일이 없는 이들이 난임 여성이라는 공통 분모를 매개로 연결돼 유대를 맺.. 2023. 5. 5.
손병현 소설집 <순천 아랫장 주막집 거시기들>(문학들) 눈치도 일머리도 없는 중년 남자, 초등학생 시절에 그림으로 받은 상이 자랑의 전부인 화가, 평생 제대로 가족을 돌보지 않은 떠돌이, 사업이 망해 도망치듯 도시를 떠나온 남자, 절에 버려져 자라는 아이들, 일자리를 잃고 고시원에서 포커로 소일하는 시간 강사, 원정 성매매를 하다가 코로나 때문에 밥벌이가 막힌 여자...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 같이 어디에도 쉽게 발을 붙이지 못하는 낙오자다. 이들이 겪어 온 세상은 차갑고 가차 없다. 이들에게선 오랫동안 찌든 패배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딱히 선량하다는 인상을 주지도 않는다. 오늘 당장 사라져도 아쉬워할 사람 하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그냥 사라지길 바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쓸데없이 밥이나 축낸다는 이유로. 이 소설집의 가장 큰 특징은 .. 2023. 5. 3.
최정나 장편소설 <월>(문학동네)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한국 문학 소설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내게 묻는다면, 최정나 작가의 를 첫손으로 꼽겠다. 최 작가의 단편은 마치 소란스러운 술집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쓸데없지만 흥미로운 대화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끄러웠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는데, 이상하게 끌려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단편보다 장편을 지나치게 편애하는 내게 는 깊은 인상을 준 몇 안 되는 소설집이었다. 신작이 나오길 기다린 작가인데, 반갑게도 소설집이 아닌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작가 특유의 맛깔나는 수다가 여전한데, 이야기를 장편으로 확장하니 수다가 매력적인 장광설로 변신한다. 주인공 없이 다양한 인물들이 느닷없이 끼어들어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는데, 계통 없이 떠돌던 이야기들이 .. 2023. 2. 19.
김유담 장편소설 <커튼콜은 사양할게요>(창비) 취업 준비 과정이란 게 언제 어디서 내릴지 모른 채 2호선 순환열차를 타고 뱅뱅 도는 일과 비슷하다. 괜찮은 일자리는 적고, 그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많으니, 전공과 적성을 살리는 취업은 언감생심이다. 꿈과 이상만 좇다간 밥을 굶기 십상이니, 거지꼴을 면하려면 적당히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회사라는 조직은 직원에게서 월급 이상을 빼먹으려고 달려드는데, 직원은 일에서 밥벌이 외엔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니 말이다. 취업 빙하기인데도 매년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이 점점 높아지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10여 년 동안 몇몇 직장을 경험하고 깨달은 사실은, 직종과 규모에 상관없이 직원이라는 존재는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과연 대한민국에 직원의.. 2023. 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