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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저수지 여행) 맑은 수채화 닮은 그곳은 늘 새롭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0. 6. 11.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4847

 

 

 

 

 

[금토일] 맑은 수채화 닮은 그곳은 늘 새롭다 
 
연기 고복저수지 
 
 
     
 
저수지 가는 길 차창 밖은 바람에 흔들리는 밥풀떼기들로 환하다. 언젠가부터 대전의 거리는 이팝나무들이 뿜어내는 밥내음으로 풍성해졌다. 녹지계획에 따라 수많은 이팝나무들이 본디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나 빌딩숲으로 주민등록을 옮겼다. 입 없는 이팝나무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말없이 트럭 짐칸에 올랐다. 이팝나무 든 자리에 머물렀던 이름 모를 가로수들의 행방은 뜬소문처럼 묘연하다. 유행처럼 왔다가 유행처럼 떠난 가로수들의 행방을 궁금해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게 이팝나무는 본래부터 있었던 존재인양 보도위에 우뚝하다.

겨우내 보도블록 아래 뿌리로 스미는 짜디짠 염화칼슘 눈 녹은 물을 견뎌낸 이팝나무는 염화칼슘보다 더 하얀 꽃을 훈장마냥 늘어뜨리며 오뉴월을 알린다. 도시의 정형성과 자연의 비정형성의 경계선에서 이팝나무는 근심 없어 보였다. 꽃그늘 밑 은은한 단내 속에서 사람들의 표정은 안온하다.

 

푸른 나뭇잎과 더불어 마른 햇살에 반짝이는 하얀 꽃은 쑥버무리를 닮았다. 쑥향과 멥쌀가루에 파고든 은근한 단맛은 상상만으로도 너른 들판의 여유로움을 불러들인다. 이른 아침의 가벼운 식사로 궁진해진 정오 무렵의 입가를 혀로 핥으며 시장기를 돌려보내려 했지만 쉽지 않다. 급한 마음에 쑥버무리 찜통을 열다 "앗뜨뜨!"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검지를 부여잡았던 기억이 되살아온다. 몇 년째 맛보지 못한 봄의 소박한 별미는 미각보다 후각과 촉각으로 더 선명하다.

 

대전 외곽에 이르자 이팝나무와는 다른 수종의 가로수들이 더 많이 눈에 띈다. 연기군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유행은 아직 이곳까지 당도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불러들인 물은 물고기들을, 그 물고기들은 다시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연기군 서면 고복리에 위치한 고복저수지는 이제 본래의 목적(농업용수 공급)보다 낚시터로 더 유명하다. 1990년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이래 저수지는 강태공들의 만남의 광장으로 용도 변경된 지 오래다.

1949㎢ 의 제법 넓은 면적을 가진 고복저수지는 주말이면 찰진 손맛을 보려는 강태공들로 북적인다. 어종은 가물치, 붕어, 잉어, 메기 등으로 다양하지만 새벽부터 붙박이마냥 자리를 잡는 강태공들로 인해 명당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다.

 

한 여름에 가까운 열기를 머금은 햇살에 물비린내가 확 피어오른다. 김을 풀어 넣은 듯 짙푸른 물아래서 물고기 떼가 날아다닌다. 잉어로 짐작되는 큰 물고기 한 마리가 수면위로 튀어 오르다 몸을 감췄다. 물고기는 물속에 거하는 한 새와 다름없다. 눈에는 닿아도 손에는 닿지 않는 새처럼 물고기는 쉽게 자신의 몸을 사람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물고기에게 있어 물은 하늘이요 지느러미는 날개다.

 

스스로 맑음으로써 자족하는 물에는 큰 물고기가 날 수 없다. 악취와 비린내가 교차해 구별되지 않는 지점이 큰 물고기가 살만한 곳이다. 물비린내는 이곳에 사는 물고기의 냄새와 닮아있다. 나는 내 손바닥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짭조름한 지린내가 비강으로 퍼진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냄새다.

 

"적으로부터는 멀리! 나에게는 가깝게!"

 

강태공은 이 같은 공격과 방어의 전범에 충실한 전술가다. 물고기는 강태공으로부터 멀리, 낚싯바늘과는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다. 이제 남은 것은 강태공의 인내심뿐이다. 한 강태공의 찌가 흔들린다. 격렬한 파장이 일며 수면의 물비늘을 잘게 부순다. 물고기 한 마리가 솟아오르며 지느러미로 날갯짓한다. 물에서 벗어나 뜰채에 담긴 물고기에게 있어 유선형의 몸통과 지느러미는 사족이다. 손바닥만 한 붕어 한 마리가 바늘에 입이 꿰인 채 다급한 숨을 내쉰다. 사람의 허파가 물속에서 사족이듯 물고기의 아가미 역시 물 밖에서 사족이다. 물속의 용존산소와 대기 중의 산소는 마치 다른 원소인양 아득하다. 동료 하나가 밖으로 끌려 나가 가쁜 숨을 내쉬고 있지만 무리를 이루되 연을 맺지 않는 물고기들은 물아래서 무심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도 이 같이 아득해지지 않았는가.

 

고복저수지를 둘러싼 순환도로를 걸었다. 도로는 약 6.5㎞ 길이로 2시간가량 걸으면 저수지 한 바퀴를 돌아보기에 충분하다. 강태공으로 변신하지 않는 한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저수지의 물과 물고기는 풍경의 일부다. 그러나 풍경은 전부이건 일부이건 간에 범상치 않다. 풍경이 풍경으로써 전하는 말은 언어보다 이미지로 남아 오랜 시간동안 머리에 머물기 때문이다. 풍경은 그 존재 자체와 별개로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풍경으로 재구성돼 과거를 추억하게 만든다. 낚싯대가 없어도 그리워하며 찾아올 이유는 충분하다. 쉴 줄 모르는 계절은 저수지 주변에 사람의 예측을 벗어난 수많은 수채화를 그리다 지운다. 그러므로 저수지의 풍경은 늘 새롭다. 우리가 보는 풍경은 언제나 '신상'이다.

 

순환도로는 저수지의 잔잔한 표면마냥 경사 없이 유순하다. 다만 몸무게 실린 발을 그대로 반탄 하는 아스팔트가 아쉽다. 순환도로를 따라 오리와 메기매운탕 전문음식점들이 가로수 마냥 늘어서 있다. 비포장도로는 방문객들을 음식점 가까이로 당기기에는 역부족인 길 아닌 길이었으리라. 그러나 예까지 와서 음식점을 오가는 자동차를 피해 갓길과 아스팔트사이를 줄타기해야 하는 현실이 탐탁지 않다.

 

갓길로 남김없이 꽃잎을 털어낸 벚나무가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가 햇살을 산란시켜 도로위로 흩뿌린다. 조금 더 일찍 왔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잎사귀를 쓰다듬으며 지나가 버린 시간 앞을 서성였다. 벚나무 아래서 웬 놈이 머리를 흔든다. 너무 작은 녀석이라 쭈그려 앉아 고개를 숙여야 했다. 붉은 광대나물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옆으로 파란 개불알꽃이 그득하다. 철을 모르고 칭얼대는 노란 애기똥풀도 고개를 빠끔거린다. 벚나무 아래에 자그마한 삼원색의 우주가 펼쳐져있다. 아! 너희들이 있었구나!

 

솜방망이, 말냉이, 콩제비꽃, 구슬봉이, 살갈퀴 등등 갓길 바닥은 도깨비시장마냥 다양해 눈 쉴 틈 없다. 한번 아래로 향한 시선은 시계추처럼 좌우로 흔들리며 올라갈 생각을 모른다. 길 따라 줄지어선 가로수들의 질서 사이로 계통 없이 피고 지는 야생화의 무질서가 정겹다. 나는 학창시절 서울서 보았던 그라피티를 떠올렸다. 도심 문화 공간으로 조성된 거리의 벽 한구석을 채운 원색의 향연. 벚나무 그늘 아래 세상은 그라피티처럼 생생하다. 관심 가지지 않아도, 부르지 않아도 때 되면 찾아와 바닥에 터 잡는 부지런한 녀석들. 약간의 무질서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자연은 이처럼 다채롭다. 저수지에 볼거리가 없다는 투덜거림이 귓가를 스친다. 우리는 자주 "보이지 않는다"와 "보지 못했다"는 말의 의미를 혼동하곤 한다.

 

바람이 뭍에서 물가로 향한다. 물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물고기 냄새가, 뭍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나무 냄새가 난다. 낮은 언덕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에는 침엽수의 꼿꼿함과 활엽수의 넉넉함이 동시에 서려있다. 천천히 오래 자라는 나무는 사람과 달리 오고 감에 있어 서두르는 법이 없다. 그 여유로움은 자족(自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리라. 이파리 마다 바글거리는 엽록소는 광합성으로 불리는 자족 현상과 신록의 원천이다. 엽록소는 나무 스스로 타고나는 것이어서 뺏길 수도 빼앗을 수도 없다.

 

자급자족하는 나무는 나눠줄 것도 빼앗을 것도 없기에 여유롭다. 살기 위해 반드시 다른 산 것을 죽여서 먹어야 하는 사람들의 쫓고 쫓기는 운명으로부터 한발 빗겨선 나무는 초연하다. 텅 빈 뱃속에서 두꺼비 울음소리가 난다. 자족할 방법 없는 내 뱃속은 때 되면 늘 그렇게 운다. 일행의 발길은 바쁘게 메기매운탕집으로 향한다.

 

비늘 없는 것들은 여간해선 죽지 않는다. 미꾸라지, 메기, 가물치 등 대개가 그러하다. 탁류 아래서 녀석들은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제 성질을 못 이겨 뻗어버리는 빙어의 솜털 같은 생명력과 1급수 아니면 숨도 쉬지 않는다는 쉬리의 까탈스러움을 비웃는다. 수틀리면 배부터 까뒤집고 보는 비늘 있는 것들과 대조되는 녀석들의 강인한 생명력은 뭇사람들에게 있어 '자양강장'이라는 소박한 신앙의 상징이 된지 오래다. 예나 지금이나 추어탕과 메기매운탕, 가물치 곰탕은 없어서 못 먹는 대표적인 보양식 아닌가. 민물횟집 어딜 찾아가던 간에 녀석들은 대부분 고가(高價)내지 시가(市價)로 유통된다.

 

메기는 늦가을부터 그 다음해 봄까지 먹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겨울을 난다. 그렇게 겨울을 난 메기의 몸속에는 잡것이 없다. 따라서 메기는 3~5월 사이에 잡힌 것을 최고로 친다.

 

메기매운탕 국물은 거무튀튀한 붉은색으로 팔레트 위에서 엉망으로 뒤섞인 물감을 연상시킨다. 국물에 잠겨있는 메기는 지을 수 있는 가장 처참한 표정을 짓고 있다.

 

허옇게 익은 눈깔과 일그러진 입술 양옆으로 늘어진 긴 수염. 힘없이 벌어진 주둥이 사이로 끄르륵 신음소리가 당장이라도 흘러나올 것만 같다. 불가에서 말하는 아귀(餓鬼)가 바로 이런 모습일까? 매운탕 속 세상은 말로만 듣던 무간지옥을 연상시킨다.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쉽게 숟가락을 놓을 수 없는 모양새다.

 

메기매운탕은 대체로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편이다. 특유의 비릿한 흙냄새가 그 이유다. 그 흙냄새를 얼마나 잘 잡아내느냐가 요리의 맛을 좌우한다. 어설프게 냄새를 잡아낸 메기매운탕은 먹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냄새를 잡아내고 감칠맛을 살리는 비법이 맛집과 맛집 아닌 집을 가른다. 맛은 찰나의 미각을 통해 뇌 속에 각인된다. 레시피의 활자로 닿을 수 없는 비법의 영역은 각 음식점마다 고유하다.

 

중독이다. 버릴 수 없는 기억에 견딜 수 없는 손님들은 늘 그곳을 찾아 미각을 되살릴 수밖에 없다. 맛집은 그렇게 단순하고도 복잡한 원리에 따라 만들어지고 재생산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국물을 한 숟갈 떴다. 흙냄새는 빠지고 진한 감칠맛만 남아있다. 일행모두 같은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잘 찾아 들어온 게 분명하다.

 

그릇에 담긴 메기의 속살은 뽀얗다. 거무튀튀한 몸통만으로는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 담백하고 하얀 살점이 메기의 암갈색 기름진 껍질아래에 숨어있다. 살점을 떼어내 얼큰한 국물과 함께 씹었다. 살점의 질감은 메기 생전의 탄력 있고 다부진 몸통을 닮아있다.

입안에서 부서지는 살점사이로 국물이 스며들어 또 다른 맛을 형성한다. 소주 한 잔 생각이 극심하다. 가야할 길 멀어 흐린 술잔에 입술을 기댈 수 없는 처지가 안타깝다.

 

매운탕 속 사리는 명품 조연이다. 그중에서도 수제비는 주연 급 조연으로 불리기에 손색없다. 살점대신 국물 속 수제비만 골라 떠먹는 일행은 어딜 가나 늘 존재하니 말이다. 수제비는 전략적 제휴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사리는 먹는 재미만 주는 게 아니라 매운탕 속 여분의 흙냄새를 잡아 감칠맛을 살려주는 역할도 해주기 때문이다. 냄새도 잡고 먹는 즐거움도 주고, 큰돈 들이지 않고 매상도 올려주니 식당입장에서는 이만한 일등공신이 없다.

 

국물 속에서 대극을 형성하는 무와 미나리도 볼만하다. 무는 국물 속에서 자신의 맛을 내놓고 다른 재료의 맛을 품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냄비 속에서 국물은 무의 시원한 맛을 품어 풍요로워지고 무는 메기를 품어 또 다른 메기로 태어난다. 그러나 그 역할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게 나뉘는 것도 무다. 마지막에 국물의 뒷맛을 달게 만든다는 이유 때문이리라. 그러한 이유로 메기매운탕에 무를 넣지 않는 음식점도 종종 있다. 그 문제는 약간의 부지런함만 있으면 해결된다. 맛을 품은 무를 마지막 단내를 뿜어내기 전에 건져먹으면 끝이다. 적당히 익어 맛을 품은 무는 씹히는 질감도 메기에 못지않다. 무는 정숙해보이나 은근히 요부다.

 

상호작용하는 무와 달리 미나리는 독립적이다. 미나리는 국물 속에 들어가 풀죽어서도 결코 자신의 향을 잃지 않는다. 무간지옥 같은 국물 속에서 미나리는 홀로 발랄하다. 미나리는 국물에 섞이되 매몰되지 않는다. 홀로 정신을 잃지 않고 국물의 텁텁함으로부터 사람들을 깨워주는 미나리는 그 독특한 개성으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서있을 듯 하나 의외로 환영받는 존재다. 미나리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당찬 아가씨를 닮아있다.

 

여럿이 살점 발라먹기 경쟁을 벌이는 사이, 다른 이들이 손대지 않는 맛을 찾아 독야청청 하는 것도 맛 즐기기의 묘미다. 식사가 얼추 끝나자 국물 속에는 메기 머리만 남았다. 사실 메기의 가장 맛있는 부위는 따로 있다. 머리 양쪽에 조금씩 붙은 볼때기 살이 그것이다. 대구 볼때기 마냥 뜯어 먹을 게 많은 부위는 아니나 그 맛은 대구가 그렇듯 메기도 그러하다. 메기의 처참한 표정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볼때기 살을 뜯어먹은 후 머리에 붙은 껍데기를 쪽쪽 빨아 먹는 것도 재미다. 그중에서도 메기의 입술부위가 가장 맛있다. 피날레는 메기의 양 아가미 사이에 붙은 내장이다. 쫄깃한 식감은 곱창의 그것과 비슷해 쉽게 입안에서 부서지지 않는다.

 

얼마 전 중국산 메기 내장이 창난젓으로 둔갑돼 물의를 일으킨바있다. 지난해 9월부터 수입된 메기 내장과 가짜 창난젓 총 190톤 중 회수된 것은 40톤, 나머지 150톤은 시중의 가판대와 소비자들의 뱃속에 놓여있다. 그 이후 메기 내장은 먹지 못할 쓰레기로 전락했다. 서해를 건너온 메기 내장은 무죄다. 유죄판결은 거기에 양념을 버무려 유통시킨 업자들의 가슴에 내려져야 온당하다. 결국 그들에게 단속의 철퇴는 내려졌지만 메기 내장에 대한 신원복권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더운 게 들어간 몸은 모공마다 더운 물을 쏟아낸다. 등짝이 흥건하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간지럽다. 바람이 분다. 그 중 한 자락이 방향을 틀어 등과 웃옷사이 좁은 공간을 파고든다. 파스를 바른 듯한 청량감이 척추를 타고 머리를 거쳐 몸 끝까지 타고 흐른다.

 

반가운 녀석을 만났다. 갓길로 개망초 몇 송이가 수줍게 피어있었다. 대한민국 대표 잡초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녀석. 아직 때가 아닌데…. 선발대인가 보다. 또 다시 바람이 분다. 망초 꽃송이가 바람의 방향을 따라 누웠다가 일어난다. 바람에 물비린내가 짙다.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걸리자 그림자들은 모습을 감춘다. 쏟아지는 햇살과 열기를 속절없이 받아내야 하는 아스팔트 위로 일행들이 걷는다. 살짝 현기증이 인다. 아지랑이 사이로 흐려지는 풍경들이 엷은 수채화를 그리다 지운다. 발길의 머뭇거림이 깊다. 조만간 다시 찾아와야 할 것 같다. 인연을 맺은 이상 모질지 못해 도리가 없다.

 

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