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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조를 머금은 대전의 도심위로 인공의 불빛들이 휘황하다. "먼 곳은 어디든 아름답다. 먼 곳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황홀하게 한다"던 보들레르는 ゾ昰� 보고 그리도 황홀했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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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깝고도 먼 곳쉽게 말하면서도 쉽게 행하여지지 않는 레저 중 하나가 등산이다.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일을 하나의 의식처럼 여긴다. 등산은 산의 가파름을 몸으로 정직하게 받아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려면 몸은 필연적으로 산과 밀착해야 하는데 그 밀착력은 오로지 스스로의 몸 안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러한 몸의 작용과 반작용을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산은 가깝지만 먼 존재다. 국토의 70%를 차지함에도 불구, 산은 본의 아니게 오르는 사람만 늘 오르는 심정적으로 단절된 장소다. 남아있는 30%의 평야는 지적법상 분할돼 소유권·전세권·지상권·임대차 보호법상 권리 등의 객체로 서류상 떠돌고 있다. 그 떠도는 수많은 서류 모서리마다 많은 사람들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표류한다. 그들의 눈에 산은 암초에 다름 아니다. 2. 예고 없는 출발"왜 가서 생고생을 하느냐?"
경제적인 가치가 미덕인 시대에 등산은 우공이산(愚公移山)과 동의어로 보이기 십상이다. 꼭대기서 굽어보는 산하가 아름답다고는 하나 그보다 아름다운 풍경은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공기가 맑다고는 하나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먼지 묻은 도심 속에서 견뎌야 한다. 운동이 된다고는 하나 헬스장이 더 체계적이며 시간대비 효율성도 높다. 이처럼 경제적인 가치로 파악되는 등산은 온갖 비효율적인 요소로 가득하다.
초여름을 향해가던 어느 날 늦은 저녁, 근무를 마친 내게 사진부 우희철 부장이 계족산 야간산행을 제안했다. 그 제안에는 덤으로 산 정상 봉황정서 비박에 일출 구경까지 더해져 있었다."그곳에 산이 있어 오른다"는 산악인 조지 말로리의 말은 "산은 산이로되 물은 물"이라는 성철스님의 화두만큼이나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어 회의적이다. 바깥에서는 보이되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운무처럼 산악인들의 화두는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없어 가파르다. 크고 작은 산에 수없이 많이 올라보았지만 야간산행은 처음이다. 산중의 어둠에 몸을 내맡겨보면 나름 산에 오르는 이유다운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 싶었다. 마음 맞는 동행과 함께 하는 등산은 즐거운 고행이다. 예고 없이 찾아온 즉흥적인 제안에 즉흥적인 동의가 이어졌다.
3. 도시의 야경히말라야, 차마고도 등을 경험한 바 있는 우희철 부장의 배낭꾸리기는 신기에 가깝다. 야간산행에 익숙한 그의 손놀림을 따라 신속하게 커다란 배낭 두 개가 모양새를 갖춘다. 침낭과 바람막이, 식수 등으로 채워진 배낭은 부피에 비해 가벼워 놀랍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배낭 안을 살피며 배움은 경험을 앞서지 못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감한다.
우 부장의 지프차는 고산자 김정호 마냥 십 수 년간 도로로 연결된 한강이남 대부분을 훑었다. 시트에는 수많은 주유소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다. 번호 있는 도로와 번호 없는 도로를 분별하지 않는 지프차는 내비게이션 없어도 정확히 목적지로 향하는 우 부장과 닮았다. 가게에 들러 캔맥주와 안주거리를 추가로 실은 지프차는 밤의 고요를 깨며 계족산을 향해 가로등 사이를 내달렸다.
낮에는 걷는 게, 밤에는 차안이 좋다. 낮에는 시골의 풍경이, 밤에는 도시의 풍경이 좋다. 낮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과 밤에 육안으로 보이는 교외의 풍경은 밋밋하기 짝이 없다. 도시의 낮 풍경은 체계적인 신호와 기호화된 도로의 곁다리에 불과하다. 운전석이라는 전적으로 개인화된 공간속에서 앞서 가는 차와 도로 옆 건물은 빨리 지나쳐야 할 장애물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교외의 어둠역시 걷는데 장애다. 신록과 지천으로 피어있는 들꽃의 생생함은 어둠속에서 풀죽어 아무 말 없다. 보이지 않아 목적지와 거리를 가늠하기 힘든 고요한 길은 두렵다.
막힘없는 도로위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은 쓸쓸하고도 아름다워 마음을 흔든다. 차 없이 걸어서 가로지르기에는 붉은 가로등 불빛이 우울하다. 감상이 길어지면 처연해지고, 처연함이 길어지면 청승이 된다. 쓸쓸함과 아름다움의 교차로는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지나치는 게 옳다.
4. 이상적인 길산의 어둠은 일찍 찾아오며 깊다. 야간산행에서 가장 우려했던 부분 또한 어둠이다. 그러나 우 부장의 발걸음은 거침없다. 반(半)산악인이나 다름없는 그는 산길에 몸을 바싹 붙이며 앞서 나갔다. 광원(光源)은 아직 채 차오르지 않은 달 하나뿐이어서 희미했다. 너무 어둡지 않느냐는 불안 섞인 질문에 그는 곧 잘 보이게 된다며 웃음으로 답했다. 믿는 것밖에 도리가 없어 무작정 뒤를 따랐다. 믿음에 대한 보답은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능선에 오르자 어둠속에서 활짝 열린 동공 안으로 산이 들어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길 위의 자그마한 돌 하나하나가 윤곽을 드러내며 야객(夜客)을 맞는다. 소나무 가지 사이에 걸쳐진 달은 감히 육안으로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밝다. 어찌 이토록 밝을 수 있느냐는 탄성 섞인 질문에 우 부장은 옛 사람들도 모두 이 길을 걸었다며 웃었다.
그는 어느 길이던 간에 그 길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길이라고 말했다. 길은 자연의 기운을 거스르지 않는 안전한 곳 중에서 가장 빠른 지점만을 연결해 형성되기 때문에 아무리 좁고 험한 길이어도 그보다 나은 길은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길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에 의해 발견되는 것에 불과하다.
산길은 늘 에둘러 정상으로 흐른다. 산의 위엄은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곳곳에 서려있어 쉽게 정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산은 길손에게 자신의 구석구석을 억지로 다보여주며 흠씬 땀을 빼놓고 나서야 고지를 내준다. 산의 정상은 그 산의 모습이기도 하다. 정상이 좁고 날카로우면 낮아도 험로를 품은 산이고, 넓고 뭉뚝하면 높아도 순로를 품은 산이다. 계족산은 적당히 낮으면서도 순해 나이 지긋한 이들이 단골이다.
산은 수많은 길을 예비해 두고 있다. 멧돼지 다니는 길, 꿩 다니는 길, 고라니 다니는 길… 그러나 그 길들은 사람의 길과 교차하지 않는다. 때문에 사람의 길에서 짐승을 마주치는 일은 드물다. 신호등 하나 없어도 산은 매우 체계적인 교통시스템 하에 관리되고 있다. 산의 신령스러움은 여기에 있다. 산속에서 사람은 짐승과 자연스럽게 내외하며 조화를 이룬다. 우연처럼 스치거나 사로잡으려 짐승의 길로 달려들지 않는 한 녀석들은 먼저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파도치며 이어지되 마주치지 않는 길은 피차간 생로(生路)다.
그러나 산에게는 자신의 기운을 거스르며 형성된 길까지 통제할 여력이 없다. 로드킬은 사람의 길이 짐승의 길과 억지로 포개지며 벌어지는 참극이다. 오늘 밤도 산의 교통시스템을 벗어난 수많은 자동차와 짐승들이 신호등 없는 생사의 교차로를 가르며 죽이고 죽거나 혹은 죽어갈 것이다.
산에 오른 지 50여분이 흘렀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흐르는 땀을 핥는 바람이 강해진다. 방해물 없이 내달리는 바람을 타고 옅은 찔레꽃 향기가 후각을 자극한다. 향기의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산 아래 오목한 분지로 인공의 불빛들이 휘황하다. 그 모습을 봉황정서 아껴보려는 마음에 발길이 서둔다.
5. 빛오후 11시 30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한 밤의 봉황정은 바람과 친하다. 정자 안으로 몸을 들이밀자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바람이 무리지어 팔각으로 치닫는다.
굽어본다. 계족산-식장산-보문산-구봉산-수통골로 이어지며 나지막하게 굽이쳐 흐르는 능선 아래 분지는 사람들을 증거하는 수많은 불빛들로 영롱하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직선과 곡선을 형성하는 불빛은 도로의 흔적, 은하수마냥 무리를 이루고 있는 불빛은 아파트 단지와 주거 지역의 흔적이다. 좌측 하단 대전 I.C로부터 이어지는 경부고속도로 나트륨등 불빛은 신탄진 방향으로 뱀처럼 기어가고, 분지를 가르는 갑천의 굴곡을 따라 이어지는 고속화도로위로 수많은 자동차 전조등들이 하천을 따라 흐른다. 저 멀리 수통골 너머로 계룡산 천왕봉의 윤곽이 보일 듯 말듯 아련하다. 산 아래 선비마을 단지 창문마다 규칙적으로 배열된 형광등 불빛은 성기어서 저마다 빛나고, 저 멀리 유등천 너머 샘머리 단지 불빛은 촘촘하게 무리를 이루어 한 덩이로 빛난다.
가까운 곳의 빛은 눈에 직선으로 들어와 날카롭고, 먼 곳의 빛은 눈에 굴절돼 들어와 부드럽다. 원색으로 빛나다 갑자기 소멸해버리는 가까운 곳의 빛은 현실적이고, 아련히 파스텔 톤으로 빛나다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사그라지는 먼 곳의 빛은 꿈결 같다. 두 빛의 성질이 다르지 않을 터인데 마음은 늘 먼 곳의 빛을 편애한다. 그와 같은 편애가 원근법과 보이지 않는 대기의 벽이 만들어내는 환각인줄 알면서도 먼 곳으로 향하는 시선은 빛과 더불어 반짝인다.봉황정 콘크리트 바닥에 매트와 침낭을 깔고 LED 랜턴을 밝혔다. 매트 몸을 얹자 마치 전기라도 들어온 양 온기가 올라와 엉덩이를 감싼다. 자그마한 LED 랜턴은 일신의 크기로는 믿겨지지 않는 밝기로 봉황정 한 구석을 채운다. 스스로 열을 발산하는 것도 아닌데 고작 몇 센티미터 두께로 냉기를 차단하는 화섬재질 매트와 전력 소비율 대비 높은 휘도를 자랑하는 LED 랜턴을 바라보며 과학은 결국 긍정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산꼭대기서 깨달아야하는 아이러니에 헛헛했다. 눈 위에 깔아도 그 아래 눈이 녹지 않는다는 매트의 무게는 고작 700g에 가격은 2~3만 원 내외다. 높은 에너지효율로 발전소가 부족한 저개발국가에 널리 보급중이라는 고휘도 백색 LED 랜턴은 인터넷쇼핑몰서 1만 원도 채 되지 않는다.
불현듯 출출함이 몰려들어와 위장이 아쉬운 소리를 지껄인다. 잠들지 못한 깊은 밤이면 맥주와 소시지의 마리아주(Marriage)가 그립다. 배낭 속 먹을거리를 찾는 손길이 바빠진다. 과학은 출출함을 이기지 못한다.
새벽 1시, 보름을 이틀 앞둔 일그러진 달은 잔광만 남긴 채 저 멀리 천황봉 뒤편 서쪽 하늘 아래로 가라앉았다. 아파트단지와 주거지역의 불빛이 사라진 분지위로 날실과 씨줄처럼 얽힌 도로만이 빛난다. 도시는 사람의 하루가 저문 뒤에야 비로소 저문다. 그 모든 것을 조망한 산꼭대기 사람들 역시 도시와 더불어 저물기 위해 침낭에 몸을 실었다. 일출 예정시간은 새벽 4시 30분. 봉황정은 일출보다 낙조와 더 친하다. 동녘은 계족산성과 맞대고 있다. 우리는 일출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나 동쪽으로 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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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저문 도심위로 수많은 불빛들이 살아있음을 증거한다. 일정한 간격을 따라 줄지어선 불빛은 도로, 은하수 마냥 뭉쳐서 하나 된 빛은 주거 단지의 흔적이다. 저마다 빛나는 불빛 아래서 벌어지는 치열함이 거세된 불빛은 얼마나 냉정하고도 따뜻한가. 먼 곳은 늘 아름답고 훈수는 늘 두기 쉬운 법이다. |
6. 화해새벽 4시, 잠을 깨운 것은 알람이 아닌 사람이었다. 일출 전부터 봉황정에 오른 사람이나 봉황정에 침낭을 깔고 밤을 새운 사람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놀랍고 어색해 말 한마디 섞지 못했다. 일출까지 남은 시간은 30여분. 계족산성까지 도달하기에는 빠듯한 시간이다. 우리는 물티슈로 얼굴을 대충 닦은 뒤 부리나케 배낭을 챙겨 계족산성으로 향했다. 새벽바람에 쓸린 별들이 흩어진 자리로 검푸른 하늘이 숨 가쁘게 탈색되고 있었다. 능선과 산길을 더듬는 발걸음 또한 바쁘게 동쪽으로 향하며 숨 가빴다.
4시 40분,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줄만큼 너그럽지 못하다. 이미 일출 시간은 지났다. 하지만 능선에 가려진 동쪽 너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출에 대한 미련이 발걸음을 채찍질 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 부장을 바라보았다. 우 부장은 말없이 씨익 웃는다. 불립문자(不立文字)요 염화미소(拈華微笑)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어서 포기하면 편해진다. 몸은 마음을 따르는 법이어서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산성에 도착한 시간은 일출을 30여분 가량 넘긴 뒤였다.
일출 직후의 태양은 눈부시되 뜨겁지 않아 가슴에 품기 적당했다. 산성 위에 펼쳐진 잔디밭은 이슬 머금어 싱그럽게 빛났고, 산성 아래로 펼쳐진 운해는 짙고 넓어서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운해는 바람의 방향을 따라 산을 감싸 돌며 흘렀다. 운해 속에서 낮은 봉우리들은 섬처럼 떠다녔고 나뭇잎은 해초처럼 흔들렸다. 몇 시간 뒤 사그라질 운명을 타고난 운해는 방어기능을 상실한 산성과 더불어 산의 일부로서 아늑했다.
서기 661년 1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옹산성(甕山城)으로 불렸던 이곳에서 백제군 수천이 떼죽음을 당했다. 김유신의 항자불살(降者不殺) 권고에 임전무퇴(臨戰無退)로 응답한 결과였다. 망국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게 그리도 두려웠던 것일까? 그러나 그들의 간절한 바람과 충절은 무너진 산성 아래서 풍화했고 김유신의 나라 또한 300년을 못가 그 위에 퇴적됐다. 그렇게 포개진 오래전 나라의 백성들은 죽음이라는 정지된 형식으로 확보된 영원 속에서 서로 화해했을까? 곳곳마다 들꽃들이 움튼 산성의 기운은 귀기어린 핏빛과 멀어보였다. 문화재로서 고즈넉한 옛 성터에서 두 나라의 백성들은 이미 오래전에 화해한 듯 싶었다.
"가까이서는 꼴도 보기 싫더니 멀리서는 더럽게 아름답네."
산 아래 세상은 산성의 기운을 머금어 평화로웠다. 산 아래서 아등바등하는 이유도 결국 '너'라고 부를 수 있는 비빌 언덕 하나 얻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이제 그 안의 백성들만 잠시 시간 내 산에 올라 화해하면 될 듯 싶다. 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사진=우희철 기자 photo291@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