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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추천 앨범

<정진영의 이주의 추천 앨범> 20. 이승철 ‘시간 참 빠르다’ㆍ혁오 ‘22’ 외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5. 6. 3.

지난 주말 준면 씨와 <이주의 추천 앨범> 선정을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둘 다 혁오의 새 미니앨범 '22'가 정말 죽이는 앨범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이승철의 '시간 참 빠르다'를 두고 둘의 의견이 크게 갈렸다.

내가 장점이라고 생각한 부분이 준면 씨에겐 단점으로 보인 것이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역시 아티스트가 되긴 틀렸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아티스트 흉내를 내기에 나는 너무 타협에 익숙한 사람이다.



<정진영의 이주의 추천 앨범> 20. 이승철 ‘시간 참 빠르다’ㆍ혁오 ‘22’ 외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 이승철 정규 12집 ‘시간 참 빠르다’= 80년대 중반 한국 헤비메탈의 태동기와 90년대 가요계의 황금기를 거쳐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승철은 세대를 넘어 늘 대중과 함께 였던 보기 드문 가수입니다. 매 시간 요동치는 실시간 음원차트에 희비가 갈리고 한치 앞을 짐작할 수 없는 가요계에서 이승철은 올해로 무려 데뷔 30년차를 맞았죠. 그보다 더 대단한 사실은 지천명의 나이를 맞은 그가 자식뻘인 아이돌들로 채워진 음원차트에 이름이 올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는 그가 낡지 않은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음을 증명해주는 것이겠죠.

이번 앨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앨범에는 편안한 가운데에서도 조용한 음악적 파격을 보여주는 다양한 음악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승철 정도의 거물이라면 뭔가 대단한 걸 들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대중이 이승철에게 기대하는 것은 탁월한 가창력으로 좋은 곡을 소화하는 모습이지 실험은 아니잖아요? 정규 앨범이 귀해진 세상에 꾸준하게 정규 앨범을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실험적입니다. 그리고 현재 가요계에서 누가 앨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토니 마세라티(Tony Maserati), 스티브 핫지(Steve Hodge), 댄 패리(Dan Parry) 등 세계적인 엔지니어들에게 믹싱을 맡기고, 1억 2000만원을 들여 1877년에 제작된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구입하는 시도를 할 수 있을까요? 이번 앨범은 듣기엔 쉬워도 들어간 노력이 결코 만만치 않은 역작입니다.

이번 앨범의 가장 큰 특징은 외부 작곡가에게 작곡을 맡기되, 이승철이 직접 편곡을 맡았다는 점입니다. 뮤지션이 직접 작곡을 맡고 편곡만 외부에 맡기는 일은 흔하지만, 이는 매우 독특한 사례이죠. 개성적인 편곡의 대표적인 사례는 기타 리프(반복 악절)를 연상케 하는 피아노 연주입니다. 이는 이승철의 밴드 DNA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승철은 풀 오케스트라가 도입하는 등 어쿠스틱 연주의 맛을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을 내기 위해 전곡의 드럼 연주를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작업하는 등 다양한 음악적 시도로 변화를 꾀했습니다.

앨범 발매 전 기자와 만난 이승철은 한국 음악 시장의 한계를 언급하며 “이번 앨범이 마지막 정규 앨범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부디 그런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 혁오(hyukoh) 미니앨범 ‘22’=
 단언컨대 한국에서 데뷔 후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전 방위로 주목을 받은 밴드는 없었습니다. 밴드 혁오는 지난해 9월 미니앨범 ‘20’으로 데뷔해 아직 데뷔 만 1년차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오는 아이유를 비롯해 장기하, 타블로, 빈지노 등 선배 뮤지션들이 팬을 자처하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앞 다퉈 혁오의 새 앨범 인증 사진 및 추천 글을 남길만큼 ‘핫(Hot)’한 존재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최근 혁오의 리더 오혁이 프라이머리와 함께 작업한 이후, 혁오는 힙스터(자신들만의 고유한 패션과 음악 문화를 좇는 부류)들의 아이콘을 넘어 대중적인 관심을 받게 됐죠.

혁오의 음악은 특정 장르로 정의내릴 수 없는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르를 ‘혁오’라고 정의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합니다. 바로 세련미가 넘친다는 점이죠. 음악적으로 이번 앨범은 전작의 연장선상에 놓여있고, 큰 변화는 없습니다. 다만 혁오는 데뷔 앨범의 다소 거칠게 느껴졌던 음악적 질감이 아쉬웠는지, 이번 앨범에는 작정하고 잘 빠진 사운드를 담아냈습니다. 안정된 소속사를 찾았다는 것도 한 몫을 했겠죠. 매력적인 톤을 가진 오혁의 목소리도 여전합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오혁은 1993년생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관능적이면서도 깊은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이번 앨범에는 익숙해지면 떠나가 버리는 사람들과 그 관계들에 대해 노래한 타이틀곡 ‘와리가리’를 비롯해 ‘세틀드 다운(Settled Down)’ ‘큰새’ ‘메르(Mer)’, ‘후카(Hooka)’, ‘공드리’ 등 6곡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타이틀곡은 ‘와리가리’이지만 나머지 곡들 역시 타이틀곡 못지않은 저마다의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틀드 다운’과 ‘큰새’는 앨범보다 라이브를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역동성을 품은 곡입니다. ‘후카’는 감각적인 뮤직비디오 영상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프라이머리ㆍ오혁의 협업 앨범 ‘럭키 유(Lucky You)’의 수록곡으로 김예림이 함께 했던 ‘공드리’는 혁오만의 목소리로 재정리돼 원곡의 몽환적이면서도 나른한 분위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연출합니다.

가장 ‘핫’한 밴드인 만큼 준비된 라이브 무대도 많습니다. 혁오의 라이브가 궁금하시다면 오는 20~21일 강원도 춘천 남이섬에서 펼쳐지는 ‘레인보우 아일랜드’, 7월 4~5일 서울 성수동 대림창고에서 마련되는 ‘더 메디치 2015’, 7월 24~26일 경기도 안산시 대부도 바다향기테마파크에서 열리는 ‘안산M밸리록페스티벌’을 찾으세요.


※ 살짝 추천 앨범

▶ 제이파워 정규 3집 ‘더 파워 오브 러브(The Power Of Love)’= 앨범 설명에 담긴 현대 선법이론과 같은 복잡한 재즈 이론들을 짐작하기 어려운 팝적인 멜로디와 사운드. 앨범의 주제 역시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인 ‘사랑’. 재즈를 몰라도 즐거운 앨범.

▶ 연남동 덤앤더머 정규 3집 ‘품질개선’= ‘우리 이혼하자’ ‘마흔즈음에’ 등 현실적인 이야기를 지독히 현실적인 시각과 풍자로 풀어낸 해학적인 가사들이 매력적. 내귀에 도청장치보다 듣는 재미가 쏠쏠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 남궁옥분 미니앨범 ‘광복 70주년’= 남북통일, 인류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 현대사의 질곡을 훑는 청아한 목소리. 광복 70주년을 맞아 의미 있는 노래를 담은 앨범이 너무나도 조용하게 나왔다.

▶ 어반자카파 미니앨범 ‘UZ’= 이제 무슨 앨범을 내놓아도 기본 이상의 음악적 질을 보장하는 그룹. 다만 미니앨범인만큼 조금 더 과감한 음악을 들려줘도 좋지 않았을까.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