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덕사 성역화 중창불사 도중 대웅전 앞 경내에서 전탑좌대가 발견됐다. 수덕사 측은 2000년 7월 그 자리에 탑을 세우며, 1988년 스리랑카 종정으로부터 증정 받은 부처 진신사리 3과를 그 안에 봉안했다. 금강보탑으로 명명된 이 탑은 대웅전과 삼층석탑, 칠층석탑과 더불어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

흩어졌던 봄들이 다시 모여 실체를 이루고 있다. 거리의 마른 가지들은 저마다 품고 있던 색을 터트리며 서로를 구분 지으려는 참이다. 나무의 골격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수종(樹種)을 구별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개화(開花)는 보다 확실하게 검증된 계절의 분수령이다. 꽃으로 나무와 계절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살아있으니 살아지는 줄 알다가 봄을 맞았다. 지난해 봄과 별다를 것 없는 일상에 시큰둥하다가도 10년 전, 20년 전, 지금과 다른 공간에서 다른 모습으로 맞았던 그 하늘과 그 봄날을 상기하니 몸이 떨려온다. 과연 살아서 몇 번이나 봄을 더 맞이할 수 있을까… 느닷없는 두려움에 삶이 간절해지면, 어딘가에 몸을 맡기고 싶은 마음도 커지는 법이다. 그 어딘가는 일상에 묶인 우리로부터 너무 가까워서도 멀어서도 안 된다. 피곤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만한 곳이면 족하다. 그래야 부담이 없다.

불법의 혜명이 끊겼던 시기에 법등을 다시 밝히고 선불교를 중흥시켰던 경허선사(鏡虛禪師)는 말년에 승복을 벗고 '돈오하여 이치를 깨침은 부처님과 동일하나, 다생으로 익혀 온 습기는 오히려 생생하다'고 고백하며 곡차를 마셨다. 홀연히 화광동진(和光同塵)하다 속세에서 '박난주'라는 속명으로 생을 마쳤던 선사의 뒤안길은 그 깊은 뜻까지 헤아릴 순 없어도, 일상성을 느끼게 만든다는 점에서 범인들에겐 적지 않은 위로다. 불법을 꽃피우는 경내도, 술꽃을 피우는 사하촌도, 그가 주석했던 수덕사(修德寺)의 일주문에서 멀지 않다.


1. 饑來喫飯 困來卽眠(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잔다)

금북정맥의 등줄기에 자리 잡은 덕숭산(495m)은 동쪽으로 가야산(678m), 서쪽으로 오서산(790m), 동남쪽으로는 용봉산(381m) 등에 둘러싸여 중심부에 바위산으로 우뚝하다. 크고 작은 봉우리들에 둘러싸인 산의 형상이 마치 한 송이의 연꽃을 닮아, 예부터 덕숭산에는 사찰들이 많았다. 그중 수덕사는 강원(講院)·율원(律院)·선원(禪院)을 모두 갖춘 조계종 5대 총림(叢林) 중 하나이자 경허-만공-벽초-원담으로 이어지는 선맥(禪脈)을 자랑하는 고찰(古刹)이다. 또한 수덕사는 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서 60여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는 대찰(大刹)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덕숭산은 절의 명성에 가려 수덕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찰인데 확실한 창건 기록이 없는 수덕사엔 구전으로 떠도는 창건 설화가 많다. 수덕사 측은 창건시기를 백제 위덕왕(554~597) 때라고 밝히고 있으나, 이 역시 정확한 문헌은 없다. 다만 삼국유사(三國遺事) 제5권 피은(避隱) 혜현구정(惠現求靜)에 '(백제의 승려)혜현이 사비성 북부 수덕사에 머물러 듣고자 하는 이가 있으면 (법화경)경을 강설했다'(初住北部修德寺 有衆則講)는 기록과 '혜현이 정관 원년(627년·당 태종의 연호)에 58세로 입적했다'(俗齡五十八 卽貞觀之初)는 기록이 실려 있고, 경내 옛 절터에서 백제 와당(瓦當)이 발굴된 바 있다. 이 같은 기록과 유물들로 유추해 볼 때 창건시기를 백제 위덕왕 재위시로 추정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닌 듯싶다. 따라서 수덕사는 사실상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사찰'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무게보다 수덕사의 가치를 더 묵직하게 만드는 것은 대웅전(국보 49호)이다. 1937년 대웅전 해체수리공사 도중 중앙 마루 도리 밑을 받친 장여 바닥에서 '지대원년(1308년·원 무종의 연호) 4월 17일 기둥을 세웠다'(至大元年戊申四月十七日立柱)는 내용의 묵서가 발견됐다. 수덕사 대웅전은 우리나라에서 절대건축연대가 밝혀진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단청 없는 수수하고 간결한 모양새 속에서 그릴 듯 말듯 곡선의 나래를 펴는 대웅전은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으로 정갈하다. 세월을 견뎌낸 것들 특유의 존엄함이 그림자처럼 건물의 아우라를 형성하고 있다. 700년 전과 마찬가지로 대웅전 안은 석가모니불을 향해 오체투지 하는 사람들로 경건하다.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배부른 기둥 앞에 서면, 저 멀리서 아련하게 바닷가가 비쳐온다. 오래전 사람들도 오체투지 후 이곳에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았을 터이다.

 

2. 사랑아 사랑아

수덕사엔 여승이 없다. 여승들은 견성암(見性庵)과 환희대(歡喜臺) 등 부속 암자에 모여 조용히 수행하고 있을 따름이다. 가수 송춘희의 노래 '수덕사의 여승' 속에 깃든 눈썹달 같은 쓸쓸함의 정한을 좇아왔다면 수덕사는 올바른 목적지가 아니다. 쓸쓸하기로 치자면 백제의 옛 서울에 터만 남은 정림사(定林寺)나 미륵사(彌勒寺)가 더 위다. 또한 수덕사는 '산길 100리 인적 없는' 곳까지 발목시리도록 걸어야 겨우 보이는 절도 아니다. 수덕사 입구 주차장에서 경내 대웅전까지의 거리는 발걸음으로 채 10분도 되지 않는다. 수덕사로 향하는 이들의 옷차림의 태반은 등산복이다. 수덕사는 덕숭산 산행의 기착지다. 수덕사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산행을 겸해 절을 찾는다. 경내는 여기저기서 진행 중인 토목공사와 '인증샷'을 남기려는 이들의 가벼운 움직임으로 분주했다. 수덕여관, 선(禪)미술관, 그 밖의 부속건물 들이 경내와 엄격한 경계로 구분되지 않는 수덕사는 사찰을 넘어 하나의 문화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수덕사는 이제 작정하고 속세와 친밀한 공간이다.

비구니 절도, 쓸쓸한 절도 아니지만 수덕사엔 시대를 앞선 죄로 비틀린 운명을 살았던 여인들의 흔적이 아직도 절 언저리에 깊게 남아있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왼편으로 초가 하나가 나온다. 짧은 돌다리를 건너면 현판이 보이는데, 이젠 더 이상 숙박객을 받지 않는 '수덕여관'이다.

당대의 신여성으로 남성 중심 사회에 파란을 일으키며 스캔들의 중심부에 서있었던 김원주(일엽스님·1896~1971)와 동갑내기 화가 나혜석(1896~1948)의 동행은 수덕여관을 마지막으로 엇갈렸다. 여성 해방을 부르짖으며 가로막힌 세상을 글로써 질타하고, 자유로운 애정관을 선언하며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했던 김원주는 대개의 선구자들의 운명이 그러하듯 당대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무릎을 꺾었다. 결국 김원주는 1933년 만공선사의 문하에 들어가 굴곡 많았던 그간의 행보를 접고 속세와의 인연을 끊었다.

나혜석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내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로서 화려하게 주목 받고 지금도 어려운 세계여행을 당대에 감행했던 나혜석도 '영육 일치'를 이룰 정신적 동반자를 찾지 못한 채 좌절했다. 시대의 그늘은 신여성의 '자유연애'와 '여성 해방'을 향한 열망으로 걷어내기엔 너무 짙었다. 파격과 표준의 간극이 줄어드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다. 세상만사에 회의를 느껴 속세를 등지려던 김원주에게 현실도피라고 일갈했던 나혜석 역시 완고한 시대의 벽을 넘지 못하고 병든 몸으로 수덕사로 흘러들어와 만공선사를 찾았다. 그러나 만공선사는 그녀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낙심한 그녀는 수덕여관에 머물며 만공선사의 출가 허락을 기다리는 한편 붓 가는대로 그림을 그렸다. 이때 젊은 청년 이응노가 수덕여관을 찾아왔다.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있던 이응노에게 있어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는 8살 연상의 나혜석은 스승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다. 마음 둘 곳 없던 나혜석 또한 이응노에게 정을 쏟으며 많은 영향을 줬다. 그러나 끝끝내 만공선사로부터 출가허락을 받지 못한 나혜석은 결국 수덕여관을 떠나고 만다. 이후 마곡사에서 잠시 머물렀던 그녀는 행려병자로 세상을 떠돌다 1948년 12월 10일 서울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파란 많았던 생을 마감했다.

나혜석이 떠난 뒤 1944년 이응노는 수덕여관을 사들였다. 이후 이응노는 화단에서 승승장구했지만 나혜석으로부터 전해들은 파리에 대한 환상을 끝내 지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이응노는 1958년 부인 박귀희를 두고 21살 연하의 제자 박인경과 더불어 파리로 떠났다. 남편의 출셋길에 지장을 줄까 저어해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준 박귀희는 홀로 남은 여관에서 망부석처럼 모진 삶을 이어갔다. 이후 1968년 뜻하지 않게 '동백림사건'으로 대전 형무소에 수감된 이응노는 박귀희와 멋쩍게 재회한다. 박귀희는 법적으로 남인 그를 지극정성으로 옥바라지했다. 2년간의 옥고를 치른 이응노는 수덕여관에서 몸을 돌보며 잠시 그녀 곁에 머물렀지만, 삼라만상을 담고 있다는 암각화만 너럭바위에 덩그러니 남긴 채 2개월 만에 다시 파리로 떠나고 만다. 그것이 인연의 마지막이었다. 1989년 이응노가 파리에서 타계한 뒤에도 수덕여관을 지켰던 박귀희는 2001년 2월 23일 밤 92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내려놓았다. 그 후 한동안 폐허로 방치됐던 수덕여관은 수덕사에 인수돼 복원,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불꽃같은 사랑의 회한을 종교로 위로했던 김원주, 절망의 끝까지 달려가 절망으로 생을 마감한 나혜석, 사무치는 정한 속에서 애오라지 돌아오지 않는 사랑을 그리워했던 박귀희… 많은 이별들을 감싸고 있는 수덕여관에 어울리는 노래는 '수덕사의 여승'보다 권혜경의 '산장의 여인'이다. 권혜경은 노랫말처럼 충북 청원군 남이면 외천리 외딴집에서 홀로 지병을 앓다 2008년 5월 25일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차곡차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 권혜경 '산장의 여인' 中

예산=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