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충만한 생기는 개화(開花)로써 증명되는데, 동백은 겨울과 봄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에 가장 먼저 파고들어 화등(花燈)을 밝힌다. 개중에 성질 급한 녀석들은 한겨울에 눈꽃과 더불어 요염하게 피어나 눈길을 붙잡는다. 계절을 거스르는 매혹 앞에 동백(冬栢)이라는 이름은 필연이었을 터이나, 사실 동백은 겨울보다 봄에 흔한 봄꽃이다. 동백은 대개 봄의 문턱인 3월부터 기지개를 펴 4월까지 꽃을 피운다. 그러다보니 어느 지역에선 춘백(春栢)으로 불리기도 한다지만 동백은 동백이라고 불러야 제 맛이다. 왠지 그래야만 될 것 같다.

남쪽 땅 끝에서 북상한 동백은 충남 서천군 마량리에서 머뭇거린다. 마량리는 동백의 북방한계선과 포개진다. 북방한계선의 문지방을 넘지 못한 동백은 비인만 끝자락 해안 언덕에 무리를 이룬 채 오랜 세월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오래된 것들엔 전설과 역사의 구분이 모호한 옛이야기가 따르기 마련인데 숲을 이룬 마량리의 동백 또한 예외 아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량리 동백숲의 기원은 50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마량의 수군첨사로 있던 관리는 꿈에서 '바닷가에 핀 꽃 뭉치를 퍼트리면 마을에 늘 웃음꽃이 핀다'는 계시를 받았다. 이에 다음날 바닷가에 나가 보니 과연 꿈에서 보았던 꽃이 떠다니고 있어 관리는 이를 가져다 마을 곳곳에 심었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다소 싱거운 옛이야기지만 소박해 정겹다. 마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매년 음력 정월이면 동백숲에서 풍어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지금도 동백숲엔 풍어제와 당제를 지냈던 당집이 남아있다.

대전충남생명의숲 이인세 사무처장은 "현재 통용되고 있는 마량리 동백숲의 500년이란 수령(樹齡)은 전수조사를 통해 마을 주민들로부터 수집된 자료에 근거하는데, 확실한 수령은 나무를 베어내기 전까진 알기 어렵다"며 "생육 상태로 보면 대단히 오래된 나무인 것만은 확실하고, 숲 곳곳에 사람들의 관리를 받은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500년이라는 수령은 확실치 않아도 동백숲이 오랜 시간동안 마을 사람들로부터 귀하게 여겨져 왔음은 분명한 듯싶다. 이젠 마을뿐만 아니라 나라에서도 이를 귀하게 여겨 숲의 동백나무 80여 그루는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대접받고 있다.

농부의 그을린 피부, 보디빌더의 근육, 발레리나의 곡선…. 외양은 반드시 살아온 삶의 궤적을 따르기 마련인데 마량리 동백숲 또한 그러하다. 북방한계선에서 자라나는 특성상, 숲을 형성하는 동백의 수고(樹高)는 2~3m 내외로 500년을 헤아리는 수령을 무색하게 만든다. 거센 바닷바람도 낮은 수고의 주된 이유다. 마량리 동백은 수고를 높여 위태로워지는 대신 땅에 들러붙음으로써 삶의 방편을 찾았다. 숲의 동백들은 대부분 뿌리와 가까운 지점서부터 옆으로 두세 개의 줄기로 갈라져 자라고 있다.

줄기에 수많은 곁가지들이 넓게 퍼져있어 마량리 동백숲엔 그늘이 항상 이파리마냥 짙푸르다. 오랜 세월 바닷바람과 갯내음에 절여져 구불거리는 동백의 줄기는 그물을 걷어 올리는 어부의 억센 팔 근육을 닮아있다.

바람 잘 날 없는 마량리 동백숲에선 노거수로 대접받는 나무들에게서 느껴지는 아늑함보단 고단한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치열함이 진하게 묻어난다. 마을 사람들이 왜 화등 밝은 동백숲에서 풍어제를 지냈는지 이해할만하다. '한 오백년' 두껍고도 얇은 삶을 살아온 마량리 동백숲에선 아직도 현역의 생생함이 느껴진다.  

   
▲ 천연기념물 제169호인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숲. 동백정에 오르면 물빛 고운 바다와 작은 섬 오력도가 한눈에 펼쳐진다.

여느 때보다 쌀쌀했던 지난 겨울의 잔영 때문에 올 봄 마량리 동백숲에선 개화가 더디다. 덜 피어난 동백숲 안에선 봄은 아직 모호했지만 볕드는 숲 외곽엔 제비꽃 주단이 촘촘히 깔리고 있었다. 만개하진 않았지만 이미 동백꽃은 서로의 눈치를 보지 않는 배짱으로 저마다 개별적으로 피고 지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더딘 개화에도 봄 햇살은 구석구석 닿고 계절의 변화역시 모호함을 딛고 결국 이어지는 법이다. 짙은 초록의 잎사귀는 붉은 꽃잎과 보색을 이루고, 붉은 꽃잎은 여린 노란 수술을 감싸고 있어 동백은 색조로 강렬하다. 나무 그늘 아래선 시들기도 전에 송이 채 떨어진 동백꽃들이 새로운 꽃밭을 이루고 있다. 여전히 생기 있는 꽃송이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며 처연함을 느끼기도 전에 가지 여기저기서 동백꽃이 송이 채 하나둘씩 툭툭 떨어져 당혹스럽다. 애초에 동백숲에선 만개란 없는 모양이다. 다른 곳에선 동백꽃이 지는 5월초까지도 마량리에선 이 같은 사태가 듬성듬성 반복된다.

지난 1965년 한산군 옛 관아의 목재를 옮겨다 지었다는 동백정에 오르면 물빛 고운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엔 의도된 소품마냥 작은 섬 오력도가 놓여있다. '옛날에 장수가 바다를 건너다 신발 한 짝을 빠트린 게 섬이 됐다'는 전설이 섬에 얽혀 있으나 동백숲에 얽힌 전설과 마찬가지로 확인할 길이 없다. 섬 앞으로 작은 고깃배가 희미한 물꼬리를 매단 채 바다를 가른다. 또 다른 고깃배가 철썩거리는 파도를 딛고 해무 속으로 아득히 멀어져간다. 갈매기 몇 마리가 짙은 해무를 숨죽이며 저어간다. 확인할 수 없어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법이다. 

   
 

마량리가 속해있는 비인반도는 동서로 바다와 면한 데다 갈고리 모양으로 휘어져 동쪽 바다로 향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덕에 해돋이와 해넘이가 공존하는 마량리엔 해마다 정월이면 관광객들이 몰린다. 동해안이 부럽지 않은 해돋이 명소다.

해넘이와 달리 해돋이는 동짓날 전후 30여 일간 한시적으로만 볼 수 있다. 동백꽃 피는 봄엔 해넘이뿐이지만 쏟아지는 낙조에 물드는 수평선을 황홀하게 바라보는 일이란 눈에도 복이고 입에도 복이다.

서천의 명물 주꾸미의 살이 여무는 시점은 동백꽃 필 무렵과 비긴다. 지금 동백숲 아래선 제철 주꾸미를 맞이하는 축제가 한창이다. 동백꽃으로 눈을 채웠다면 이번엔 주꾸미 꽃으로 배를 채울 차례다. 뜨거운 물에 데쳐진 주꾸미는 짧고 통통한 여덟 다리를 방사형으로 펼치며 냄비 속에 봄꽃을 피운다. 날 풀리며 침침해진 봄 입맛을 밝히는 덴 제철 주꾸미가 제격이다. 산란기를 앞둔 주꾸미의 머릿속엔 별미인 '밥알'이 꽉 들어차있다. 주꾸미 축제장 한구석에선 '500년 동백꽃 후계목'이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 지금 마량리 동백숲에 부는 갯바람엔 부풀어 오른 흙냄새와 더불어 풋것의 비린내가 스며있다. 올 봄에도 마량리 동백숲엔 꽃이 피었다.

서천(마량리)=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

사진=정재훈기자 jprime@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