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숲에서 소나무들은 인간사 이상의 치열한 경쟁과 냉정한 처세술을 보여준다. 무리한 정면승부는 피하고, 손절매에 주저함이 없으며, 물러설 수 없는 경우엔 철저히 맞선다. 숲에서 사람은 소나무에게 살아남는 법을 한 수 배우고 간다. 정재훈 기자 jprime@cctoday.co.kr  
 

포근한 봄볕이 오래된 마을을 이불처럼 덮었다. 적당한 고립감으로 아늑한 은진송씨 집성촌 대전 동구 이사동(二沙洞)의 들녘에도 나른한 봄기운이 여린 초록과 더불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을 곳곳엔 옛 모습을 제법 온전히 보전한 재실(齋室)들이 쉼표처럼 찍혀있어 호기심 어린 과객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송촌동, 읍내동, 비래동, 가양동 등 여타 은진송씨 집성촌들이 도시화의 휘모리장단 속에서 흩어지는 동안, 개발의 손길에서 한 발짝 비켜섰던 이사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추로지향(鄒魯之鄕)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선비들은 사시사철 푸르러 주접스러운 꼴을 보이지 않는 소나무를 귀하게 여겨, 예부터 추로지향엔 소나무들이 많았다. 이사동도 예외는 아니어서 은근한 열기로 깊이 스며드는 봄볕에 상아빛깔 옷고름을 푸는 목련너머로 거대한 소나무 숲이 낮은 구릉에서 들뜨지 않은 마른 향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 오래된 묘역을 감싼 오래된 숲은 오래전 그 모습 그대로 마을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정재훈 기자 jprime@cctoday.co.kr

1. 장묘문화와 더불어 형성된 마을숲

이사동 소나무 숲은 조선시대 전통 장묘문화와 떼놓고 말할 수 없다. 계절에 얽매이는 잡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 소나무의 진중함을 선비의 절개와 동일시했던 옛 선비들은 죽어서도 소나무 곁에 있기를 바랐다. 후손들의 마음 또한 매한가지였을 터이다. 숲을 돌보는 일은 가문의 과거 영광을 되새김과 동시에 현재의 위세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본디 숲엔 다양한 수종이 존재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오랜 세월 사람들의 소나무를 향한 편애의 손길이 닿아 지금과 같은 수세(樹勢)를 이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같은 추정을 방증하듯 숲 곳곳엔 잡목을 솎아낸 흔적과 수종을 알 수 없는 오래된 나무 그루터기들이 세월의 딱지마냥 마른 솔잎 틈바구니에 눌어붙어있다.

숲이 빛에게 자리를 내준 곳엔 어김없이 옛 선비들의 안식처가 봉긋 솟아올라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소나무 숲이 감싸고 있는 은진송씨 묘역의 역사는 조선 전기의 문신 목사공 송요년(宋遙年·1429~1499) 이래 500여 년을 헤아린다. 1000여 기의 분묘가 산재해 있는 대규모의 묘역엔 동춘당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아버지 시묘살이를 위해 지은 우락재(憂樂齋) 등 재실들을 비롯해 석비와 상석, 향로석, 혼유석, 석인상, 장명등, 망주석 등 석물들이 즐비하다. 지난 2004년 봄엔 묘지 이장 작업도중 세종 때 어모장군 행충무위부사직(禦侮將軍 行忠武衛副仕直)을 지낸 송효상의 미라가 발견돼 전국적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당시 함께 출토된 복식은 임진왜란 이전의 의생활을 엿볼 수 있어 학자들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이사동 묘역은 가히 장묘문화의 백화점이라 할만하다.

역사와 자연이 조화롭게 숙성된 소나무 숲은 화려하진 않지만 깊고 그윽한 멋을 풍긴다. 비록 가문의 영광은 예전 같진 않지만 옛것을 보듬어 현재화 시키려는 후손들의 마음만큼은 소나무 숲 아래서 여전히 향기롭다. 그 향기로움과 아름다운 수세를 체계적으로 유지·관리하기 위해 대전시는 지난 2000년 12월 1일 이사동 소나무 숲을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했다.

   
 
2. 소나무는 생각보다 까탈스럽다

'소나무는 돌보지 않아도 저절로 잘 자란다'는 일반적인 인식은 반은 옳고 반은 그르다. 산림 생태계에서 소나무의 역할은 다른 나무들이 뿌리내리고 살만한 토대를 다지고 물러나는 선구목(先驅木)이다. 따라서 다른 수종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수세가 강하지 않은 이상, 소나무가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리 없이 자연적으로 숲을 유지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동행했던 대전충남생명의숲 이인세 사무처장은 "비록 소나무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수종이긴 하지만 생리적으로 양수(陽樹)인 탓에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다"며 숲 한구석에 자라고 있는 참나무를 가리켰다. 주변 소나무보다 웃자란 참나무는 나무줄기 끝에서 가지를 우산처럼 펼쳐 바닥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기름져 보이는 참나무와는 달리 그늘 아래 소나무들은 한눈에도 왜소했다.

이 처장은 "소나무 숲에 다른 수종이 뿌리 내리긴 쉽지 않지만, 일단 한번 뿌리내리면 본래 자리에 있던 소나무보다 빨리 생장해 가지와 잎으로 햇빛을 가려 그 주변 소나무는 살아남기 어렵게 된다"며 "잡목을 솎아내는 등 사람들의 관리가 없으면 소나무는 자연천이 과정에 따라 도태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설명했다. '남산 위에' 홀로 뿌리내린 '저 소나무'야 말로 실은 가장 복 받은 소나무인 셈이다. 이 처장은 "우리나라의 소나무 숲 중엔 산림 녹화사업에 따라 조성된 어린 숲들이 많아 수세를 갖추기 전까지 유지·관리의 필요성이 크다"며 "일단 사람의 손길을 탄 소나무 숲은 지속적인 관리를 받아야만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뭐든지 저절로 이뤄지는 아름다움이란 없는 모양이다.

3. 소나무 숲속의 삶도 인간사만큼 모질고 치열하다

고요한 숲속에서 '생존경쟁'이란 단어는 사람들에겐 아득해보이지만 소나무들에겐 당면과제다. 마을 전체가 굽어보이는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봉분으로 기자들을 이끈 이 처장은 리기다소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리기다소나무엔 줄기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털들이 수북하게 돋아나 있었다. 이 처장은 "저 털들은 잠아(潛芽)인데 다른 나무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리기다소나무가 고사(枯死) 직전 본능적으로 자손을 퍼트리기 위해 벌이는 다급함의 흔적"이라고 설명하며 가까운 곳에 우뚝 선 적송을 가리켰다. 리기다소나무보다 조금 더 웃자란 적송은 가지를 펼쳐 그늘로 리기다소나무를 가리고 있었다.

봉분 너머 건너편의 소나무들은 관리를 받지 못한 듯 어지럽게 밀집돼 자라고 있었다. 소나무들의 수고(樹高)는 고만고만했는데 저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하늘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개중에 몇몇은 경쟁에서 뒤처진 듯 고사해 빈 가지를 아래로 꺾었다. 10여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솎아내기 등을 거쳐 추려진 풍채 좋은 소나무들이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점잖게 자라고 있었다. 충분한 볕을 받는 복된 소나무들에게 있어 가장 큰 고민은 바람이다. 이러한 소나무들은 수고를 높이는 대신 바람과 정면 승부를 피하기 위해 옆으로 살을 찌우며 땅에 눌어붙는다. 일부에만 볕이 닿는 나무들은 그늘 쪽 가지를 과감히 정리하고 철저히 양지를 향해 가지를 뻗어 삶을 도모한다.

숲에서 소나무들은 인간사 이상의 치열한 경쟁과 냉정한 처세술을 보여준다. 무리한 정면승부는 피하고, 손절매에 주저함이 없으며, 물러설 수 없는 경우엔 철저히 맞선다. 나무란 한 나무에서 나온 종자여도 철저히 혼자라는 사실을 숲에서 깨달았다. 사람이든 나무든 모여 사는 곳에선 온전한 낭만이란 없는가 보다. 소나무에게서 살아남는 법을 한 수 배우고 간다.

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