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았던 앨범들을 1차로 추려내니 20개가 훌쩍 넘어갔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차근차근 앨범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쉽지 않았다.
13개 쯤으로 후보가 줄었을 때엔 그 중 하나를 빼는 일이 정말 괴로웠다.
그렇게 고르고 고르니 겨우 10개가 남았다.
순위를 매기지 못하겠다. 기사에도 순위는 없다. 그냥 추리기만 했다.
기사가 너무 길어져서(그래봐야 재활용이지만) 상편과 하편으로 나눴다.
▶ 푸른곰팡이 옴니버스 앨범 ‘강의 노래’
▶ 강허달림 정규 3집 ‘비욘드 더 블루스(Beyond The Blues)’
▶ 두번째달 정규 2집 ‘그동안 뭐하고 지냈니?’
▶ 빌리카터 미니앨범 ‘빌리 카터(Billy Carter)’
▶ 아시안체어샷(Asian Chairshot) 미니앨범 ‘소나기’
▶ 임인건 ‘올 댓 제주(All That Jeju)’
▶ 프라이머리ㆍ오혁 ‘럭키 유(Lucky You)’
▶ 피해의식 정규 1집 ‘헤비메탈 이즈 백(Heavy Metal is Back)’
▶ 하비누아주 정규 1집 ‘청춘’
▶ 혁오(hyukoh) 미니앨범 ‘22’
기사로 다루지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앨범은 3개이다.
▶ 김두수 정규 6집 ‘곱사무’
▶ 김일두 정규 2집 ‘달과 별의 영혼’
▶ 얼스바운드(Earthbound) 정규 1집 ‘행오버(Hangover)’
<정진영의 이주의 추천 앨범> 2015년 상반기를 빛낸 앨범 10개 (上)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 푸른곰팡이 옴니버스 앨범 ‘강의 노래’= “오직 음악!”. 레이블 푸른곰팡이 옴니버스 앨범 ‘강의 노래’의 성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렇습니다. 이 앨범이 그려내는 풍경은 바라보는 이들을 압도하거나 매혹하지 않지만, 석양이 젖어들어 붉은 물비늘을 반짝이는 도도한 강물처럼 장엄합니다.
푸른곰팡이는 과거 하나음악 출신 뮤지션들이 주축을 이뤄 만든 레이블입니다. 푸른곰팡이의 전신인 하나음악은 한국 언더그라운드 포크의 대부 조동진이 90년대에 이끌었던 음악 공동체로 한동준, 김광민, 조규찬, 낯선사람들, 장필순, 이규호 등 걸출한 뮤지션들이 이 곳을 통해 앨범을 내놓은 바 있죠.
하나음악이 한국 대중음악사에 남긴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하나옴니버스’ 앨범입니다. 하나음악은 ‘하나옴니버스’라는 이름으로 ‘겨울’, ‘바다’, ‘꿈’ 등 각각의 주제에 따라 꾸준히 편집 앨범을 내놓으며 이다오, 루시드폴 등 다양한 뮤지션들을 소개해왔죠. 하나음악을 터전으로 음악 활동을 이어나가는 뮤지션들이 함께 만든 이 앨범은 저마다 개성적인 곡들을 수록하고 있었지만, 꼭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일관적인 정서가 앨범을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개성을 하나로 묶는 이 독특한 정서가 바로 하나음악의 특징이었죠. 넘쳐나는 편집 앨범들 사이에서 ‘하나옴니버스’가 빛났던 이유일 겁니다.
‘강의 노래’는 지난 2002년 경제적 문제로 하나음악이 문을 닫으면서 중단된 ‘하나옴니버스’의 명맥을 잇는 앨범입니다. 이번 앨범의 주제는 ‘강’입니다. 조동진이 직접 나서 앨범의 프로듀서를 맡아 제작을 지휘했죠.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내용물 역시 풍성합니다. 이번 앨범에는 조동진이 18년 만에 발표하는 신곡 ‘강의 노래’를 비롯해 14년 만에 노래를 부른 조동익의 ‘오래된 슬픔 건너’, 20년 만에 함께 한 하나음악 초창기 멤버인 정원영과 이무하의 ‘새는 걸어간다’와 ‘돛’, ‘장필순’의 ‘엄마야 누나야’, 이규호(Kyo)의 ‘시냇물’, 조동희 ‘유리강’, 박용준 ‘지수리’, 이경의 ‘봄날의 따뜻한 강’, 고찬용의 ‘그 강을 따라가겠지’, 소히의 ‘그 마음(O Corao)’, 송용창의 ‘비행’, 오소영의 ‘흐르는 물’, 한동준의 ‘당신은 그렇게 흘러’, 푸른곰팡이의 신예 새의전부의 ‘너와 나’ 등 15곡이 2장의 CD에 담겨 있습니다. 각 수록곡들의 개성은 뚜렷하지만 ‘강’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엮여 유장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옴니버스가 그저 여러 곡을 한 곳에 담아내는 앨범이 아니란 사실을 ‘강의 노래’는 잘 보여주고 있죠.
앨범의 타이틀곡 ‘강의 노래’의 “고여 드는 마음의 강물/우리 이제 다시 흐르니/돌아오는 새들의 행렬/저 먼 종소리”와 같은 가사 앞에선 단순한 감동을 느끼는 차원을 넘어 숙연해집니다. 앨범의 모든 곡이 흘러간 뒤에도 두 귀에는 마치 아직도 강이 흐르는 듯 깊은 여운이 남는군요.
▶ 강허달림 정규 3집 ‘비욘드 더 블루스(Beyond The Blues)’= 블루스(Blues)는 한 마디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긴 어려운 장르이지만, 과거 미국 남부의 농장지대에서 일하던 흑인 노예들의 노동요에서 기원한 음악이란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하죠. 흑인 노예들의 피와 땀을 먹으며 탄생한 음악인만큼 블루스 보컬리스트들의 목소리에선 삶의 고단함이 묻어납니다. 싱어송라이터 강허달림이 ‘블루스 디바’로 통하는 이유 역시 그 절절하고도 깊은 목소리 때문이겠죠.
강허달림은 사실 블루스라는 장르의 테두리에 묶여있는 가수가 아닙니다. 그는 밴드 신촌블루스의 보컬 출신이긴 하지만 정규 1집 ‘기다림, 설레임’(2008), 2집 ‘넌 나의 바다’(2011)의 수록곡 중 사실 블루스라고 부를만한 곡은 많지 않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주저 없이 강허달림을 ‘블루스 디바’로 부르는 이유는 블루스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독특한 목소리 때문일 겁니다.
리메이크 앨범은 매우 흔합니다. 그러나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 1ㆍ2와 조관우 정규 2집 ‘메모리(Memory)’ 정도를 제외하면 단순한 다시 부르기 차원을 넘어섰던 리메이크 앨범을 떠올리기 쉽지 않군요. ‘비욘드 더 블루스’는 선곡부터 남다릅니다. 이정선의 ‘외로운 사람들’, 신촌블루스의 ‘골목길’처럼 유명한 곡도 있지만 송창식 ‘이슬비’와 ‘밤눈’, 윤명훈의 ‘어떤 하루’, 숙자매의 ‘열아홉 살이에요’, 고(故) 채수영의 ‘이젠 한마디 해 볼까’, 최백호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등 대부분의 수록곡들이 대중에게 낯선 편입니다. 특히 ‘기슭으로 가는 배’는 다소 난해한 포크 음악으로 유명한 김두수의 곡을 처음으로 리메이크한 사례여서 눈에 띕니다.
이번 앨범의 수록곡 중 블루스로 꼽을 수 있는 곡은 ‘외로운 사람들’ ‘이젠 한마디 해 볼까’ ‘어떤 하루’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곡들이 새로운 곡으로 들리고 또 블루스로 들립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강허달림의 목소리이겠죠. 앨범을 모두 듣고 나면 ‘블루스를 넘어서’라는 의미를 가진 앨범의 타이틀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흔한 리메이크를 흔치 않게 만드는 목소리의 힘이 돋보이는 앨범입니다. 베이시스트 서영도가 이번 앨범의 프로듀싱과 편곡을 맡고, 블루스 기타리스트 찰리 정과 피아니스트 민경인 등 정상급 연주자들이 참여해 음악적 완성도를 높인 것도 이번 앨범의 가치를 높이는 요소입니다.
▶ 두번째달 정규 2집 ‘그동안 뭐하고 지냈니?’= 하루에도 수많은 신곡들이 쏟아지는 정신없는 세상에 밴드 두번째달의 행보는 느긋하기만 합니다. 무려 10년 만에 새로운 정규 앨범을 발표하다니 말입니다. 10년 전 데뷔 앨범 ‘세컨드 문(2nd Moon)’으로 음악 판을 뒤집어 놓고 기약 없이 기다리게 만들더니, 잊어버린 지 한참 지나서야 멋쩍은 인사를 전하는군요. “그동안 뭐하고 지냈니?”
두번째달이 다양한 악기로 쏟아내는 이국적이면서도 친근한 선율의 매력은 설렘이었습니다. 두번째달의 데뷔 앨범은 매 트랙마다 음악으로 다른 세상을 펼쳐 놓았던 역작이었죠.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국적을 짐작하기 어려운 이름 모를 어딘가를 여행하는 체험을 가능하게 만든 작품이었다고 표현한다면 과장일까요? 말 그대로 ‘월드뮤직’이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민속 음악을 친근한 방식으로 재해석해 연주하는 밴드라는 정체성은 여전합니다. 남인도 지역의 구음 장단이라는 ‘콘나콜’을 퓨전재즈 풍의 연주와 결합한 곡 ‘타키타타키타다디게나도’가 결코 낯설게 들리지 않는 걸 보면 말이죠. ‘달이 피었네’로 시작해 연속으로 이어지는 ‘가라앉는 섬’ ‘똑바로 걷기’ ‘달리는 비행기’는 두번째달 특유의 여정을 엿보는 듯한 두근거림을 선사합니다. 고국 아일랜드로 돌아간 원년 멤버 린다 컬린(LyndaCullen)이 직접 만들어 보내온 곡 ‘페이퍼 보트(Paper Boat)’는 오랜 만의 새 앨범만큼이나 반가운 선물입니다.
하지만 변화도 적지 않습니다. 이번 앨범의 알파와 오메가 트랙인 ‘구슬은 이미 던져 졌다’와 ‘그동안 뭐하고 지냈니’의 넘치는 흥은 과거 두번째달의 음악에선 접하기 어려웠던 부분이죠. 강산이 한 번 변해서야 다시 돌아온 두번째달은 여기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도 품은 듯 슬그머니 음악에 우리 소리를 더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판소리 ‘춘향가’의 한 대목을 원형 그대로 차용해 소리꾼 이봉근과 협업한 곡 ‘사랑가’이죠.
아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두번째달은 앨범을 감상하는 일보다 공연을 보는 일이 더 즐거운 밴드입니다. 오는 24일 오후 8시 서울 연세대학교 백양홀에서 ‘두번째달 노래를 부르다’란 타이틀로 두번째달이 콘서트를 벌인다는군요.
▶ 빌리카터 미니앨범 ‘빌리 카터(Billy Carter)’= 블루스의 끈적끈적한 질감과 펑크(Punk)의 공격적인 에너지, 그리고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처럼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엮는 폭발적인 보컬. 이 앨범은 그야말로 괴물 같은 앨범입니다.
혹시 밴드의 이름만 보고 이 앨범을 영미권 출신 나이든 아저씨의 솔로 앨범이 아닌가 짐작했다면 헛다리를 짚으신 겁니다. 빌리카터는 3인조 혼성 밴드이지만 그 시작은 여성 멤버 둘로 시작한 듀오였으니까요. 빌리카터는 김지원(보컬)과 김진아(기타)의 2인조 어쿠스틱 프로젝트로 지난 2012년 영국 런던에서 공연 활동을 벌인 보기 드문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적을 짐작할 수 없는 앨범 전체의 정서는 아마도 이런 독특한 경험에서 나오는 것일 테죠. 2013년 한국으로 돌아와 비정규 미니 앨범 ‘크로스로드(Crossroad)’를 내놓은 빌리카터는 지난해 이현준(드럼)을 영입해 이번 앨범을 준비했습니다. 드러머가 더해지니 음악적으로 과감한 시도와 표현이 가능해졌죠.
이번 앨범에는 후회로부터 벗어나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담은 사이키델릭 블루스 ‘타임 머신(Time Machine)’, 잃어버린 길을 찾아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영원히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상반된 마음을 노래한 로커빌리 풍의 ‘로스트 마이 웨이(Lost My Way)’, 소통되지 않는 세상에서 모든 이야기들이 침묵과 다르지 않다고 꼬집는 ‘침묵’, 즐겁고 아름다운 순간만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봄’, 방황하는 이들에게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권유하는 ‘유 고 홈(You Go Home)’ 등 5곡이 담겨 있습니다. ‘원테이크(한 번에 끊임없이 녹음하는 방식)’로 녹음을 진행한 듯 라이브를 방불케하는 자연스러운 연주가 현장감을 더합니다. 정규 앨범이 아니라는 게 ‘너무’ 아쉬운 앨범입니다.
▶ 아시안체어샷(Asian Chairshot) 미니앨범 ‘소나기’= 밴드 아시안체어샷은 이제 무슨 앨범을 내놓든 각을 잡고 듣게 만드는 기대감을 줍니다. 기타, 베이스, 드럼의 단출한 3인조 라인업이라고 믿기지 않는 부피의 역동적인 사이키델릭 록 사운드. ‘한국적’이란 진부한 표현 외엔 설명이 불가능한 선율과 폭발적인 사운드의 조화로 주목을 받았던 미니앨범 ‘탈’부터 ‘탈’의 투박한 사운드를 다듬어 세련미를 더했던 첫 정규앨범 ‘호라이즌(Horizon)’까지. 아시안체어샷의 사운드는 마치 의자로 머리를 맞은 듯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영국의 ‘리버풀 사운드 시티’와 미국의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 등 세계적인 음악 페스티벌이 아시안 체어샷을 주목했던 이유 역시 그 신선함 때문일 것입니다.
‘탈’에서 마치 힘든 사냥을 마친 야수처럼 헐떡였던 아시안체어샷은 ‘호라이즌’을 통해 완급을 조절할 줄 아는 노련함까지 겸비했습니다. ‘소나기’는 ‘호라이즌’의 연장선상에서 선율의 서정적인 면을 강화하고 사운드의 모를 더욱 다듬은 음악을 담고 있습니다. 다소 힘을 뺀 몽환적인 사운드를 들려주는 타이틀곡 ‘소나기속에서’와 리듬 연주에 전자악기를 도입한 ‘버터플라이(Butterfly)’는 밴드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변화의 촉을 놓치지 않는다는 증거이죠. 그렇다고 밴드 특유의 날 것의 느낌이 줄어들진 않았습니다. 강렬한 연주로 무장한 ‘완전한 사육’과 자진모리장단의 민요 이상으로 흥겨운 한국적 하드록 사운드를 들려주는 ‘채워보자’가 앨범의 첫 번째와 두 번째 트랙에 놓인 것을 보면 말이죠.
‘호라이즌’을 프로듀싱했던 밴드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의 기타리스트 제프 슈뢰더(Jeff Schroeder)가 다시 한 번 이 앨범에 참여했습니다. 슈뢰더는 ‘호라이즌’을 통해 외국인이 한국적인 록의 감성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란 선입견을 보기 좋게 깨줬던 프로듀서이죠. 여기에 녹음은 너바나(Nirvana) 정규 3집 ‘인 우테로(In Utero)’의 프로듀서였던 스티브 알비니(Steve Albini)가 소유한 미국 시카고 소재 일렉트리컬 오디오 스튜디오(Electrical Audio Studio)에서 진행됐습니다. 믹싱은 스매싱 펌킨스의 최근작 ‘마뉴먼츠 투 언 엘러지(Monuments To An Elege)’의 엔지니어였던 하워드 윌링(Howard Willing)이 맡았죠. 이정도면 앨범을 제대로 못 만들어내기도 힘들어 보입니다. ‘2014년 2차 젊은 뮤지션 글로벌 교류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앨범 제작을 지원해준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대신 감사를 표합니다.
덕분에 노련한 맹수가 더욱 노련해져 돌아왔습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아시안체어샷은 우리가 세계 시장에서 가장 자주 이름을 목격할 수 있는 한국 밴드가 돼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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