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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2011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에 당선됐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1. 6. 7.

 

내 두 번째 장편소설 ‘도원기행(桃園紀行)’이 ‘2011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 공동수상작으로 결정됐다.

이미 2주 전 당선통보를 받았지만 그래도 당선 발표는 지면으로 나와야 제 맛 아닌가. 지난 20대 중·후반 시기의 암흑 같은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10여 년간 홀로 매달려 왔던 글쓰기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는 감격이 가슴 속에서 들끓는다.

 

- 조선일보 관련기사

당선 인터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6/06/2011060601527.html

심사평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6/06/2011060601519.html

 

- 충청투데이 관련기사

당선 발표 :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7071

당선 인터뷰 :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6926

 

 

 

- 도원기행 집필 일지 -

 

- 2008년 12월

 

 나는 첫 번째 장편소설 ‘발렌타인데이’로 제41회 한양대학보 문예상 대상을 수상했다. 21살 무렵 글로써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나는 이후 3년간 틈틈이 소설을 썼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구석에 처박혀 있던 이 차분한(=재미없는) 연애소설은 완성된 지 5년 만에 모교 문학상을 통해 생각지도 않은 빛을 봤다. 소설은 황송하게도 심사위원이었던 국문과 서경석 교수님으로부터 “너는 최고 수준의 연애소설을 써냈다”이라는 분에 넘치는 호평을 받았다.

 당시 나는 어머니의 급사, 아주 오래된 연인의 일방적인 이별 통고, 연이은 사법시험 실패, 자존감 상실, 외로움, 우울증 초반 증세, 인간적인 배신, 경제적 문제 등으로 극도로 지쳐있었다.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문학상 같은 대단한 상은 아니었지만, 그 상을 계기로 나는 처음으로 글밥의 운명을 느꼈다. 20대 초반부터 매년 시와 시조 부문으로 신춘문예에 응모해왔는데 이때부터 시를 포기했다. 더불어 사법시험도 사실상 포기했다. 다음 학기부터 나는 대부분의 수업을 법대가 아닌 인문대에서 수강했다.

 

 

- 2009년 9월

 

 그해 20대의 마지막 여름, 대학 졸업 학기를 앞둔 나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거처를 학교 근처 고시원에서 북한산 아래 보덕사로 옮겨 칩거했다. 그곳에서 가을을 맞은 나는 두 번째 장편소설 ‘도원기행’과 단편소설 3편을 썼다. ‘도원기행’은 불공평하고 던적스러운 세상을 소시민이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라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한 다소 심각한 소설이었다. 솔직히 내가 읽어도 재미없었다. 그날 밤 나는 풍경 소리 아슴아슴한 방에서 많은 소주병을 비우며 홀로 자축했다. 안주는 미니족발 6000원어치와 새우젓이었다. 부처님이 보셨다면 통탄하실 일이었을 터이다.

 

 

- 2009년 11월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어머니 사후 3년 가까이 홀로 계시던 아버지가 자꾸 눈에 밟혔다. 그렇다고 무작정 돌아가 잉여인간으로 지낼 순 없기에 나는 취업전선으로 뛰어들었다. 마침 고향의 한 종합일간지에서 기자를 뽑고 있었다. 기자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지만 왠지 기자를 하면 글을 쓰며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운 좋게도 나는 서류-필기-면접 전형을 모두 통과해 입사 통보를 받았다. 얼떨결에 나는 충청투데이 22기 수습기자가 됐다. 나는 서른 넘어가기 전에 백수 신세를 면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3개월의 수습기간을 마친 나는 편집부로 배치됨과 동시에 트래블 지면 취재 및 기사작성을 맡게 됐다. 이후 나는 휴일도 없이 1년 넘게 일에만 매달렸다. 몸은 힘들었지만 내 바이라인을 걸고 지면으로 나오는 기사에 나는 행복했다. 1년 간 다닌 여행 횟수가 내 평생 다닌 여행 횟수보다 더 많았다. 생전 처음 해외여행도 해봤다. 나는 지면을 통해 나름 많은 문장 실험을 했고, 이 같은 실험은 분에 넘치는 호평을 받았다. 무너졌던 자존감 회복의 계기였다. 이때부터 나는 단순히 글밥의 운명을 넘어 기자의 운명을 직감했다. 아무래도 평생 이 일을 하게 될 듯싶었다.

 

 

- 2011년 4월 30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트래블 취재를 위해 팀원들이 하나둘 회사로 모여들었다. 그때 잠시 인터넷 서핑을 즐기던 나는 ‘2011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 원고 접수 마지막 날이 4월 30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문득 2년간 처박아뒀던 소설 ‘도원기행’이 떠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우겨 봐도 ‘도원기행’은 내 눈엔 조금도 ‘판타지’스럽지 않았다. 내 소설 속엔 마법도 없고, 용도 없고, 절대 반지도 없었다. 그저 현실에서 좌절한 사람의 실패담과 욕망, 어설픈 내적 성숙을 다루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고개를 저으며 포기하고 취재에 나서려는 찰나, 나는 잠시 내 자신에게 “세상이 하 수상하니 도덕과 원칙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세상이야말로 환상의 세계가 아니냐”고 억지를 부렸다. 결국 나는 2년 만에 처음으로 소설 문서파일을 열었다. 나와 2년 만에 다시 상봉한 소설은 첫 문장부터 조악했다. 그러나 수정할 여유가 없었다. 원고지 20매 분량의 줄거리도 첨부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A4용지 절반가량(원고지 4~5매) 밖에 쓰지 못했다. 심지어 내가 무슨 내용을 썼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인쇄엔 15분가량이 소요됐다. 우체국에 들러 원고를 조선일보에 보낸 후 곧바로 취재차 충북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가 원고를 보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살았다. 당선에 대한 단 1%의 기대감도 없었다. 진심이다.

 

 

- 2011년 5월 24일 오후 7시 43분

 

 늘 그래왔듯 한창 편집 업무 중이던 평일 저녁, 내 휴대폰 액정에 낯선 번호가 찍혔다. 01X 식별번호에 앞자리도 여전히 3자리 번호를 사용하는 나는(휴대폰 개통 만 11년째 같은 번호를 쓰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KT로부터 전화번호 변경을 종용받는다. 내 번호를 변경 없이 계속 쓰고 싶다는 데 KT는 왜 자꾸 바꾸라고 나를 괴롭히는가? 이번에도 그런 전화인가 싶어 항의의 사자후를 내뿜을 준비를 하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조선일보 어수웅 기자입니다.”

 뭬야! 조선일보? 옳거니! 드디어 충청투데이 트래블 지면이 조선일보 레이더망에 걸려들었구나! 지난 1년간 휴일도 없이 투자한 노력이 결코 헛되진 않았다는 생각에 나는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나와 핀트가 맞지 않는다.

 어수웅 기자는 내게 “정진영 선생님이 보낸 원고가 현재 문학상 최종심에 올라 심사위원들 간에 격론이 오가고 있다”며 “공동수상을 결정해도 이의가 없는가?”라고 물었다. 난데없는 ‘선생님’ 호칭에 ‘문학상’ 최종심이라니? 그때서야 내가 한 달 전 조선일보로 보냈던 A4용지 뭉치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경악했다. 어수웅 기자 또한 내가 동종 업계 종사자라는 사실에 놀란 듯했다. 그는 “며칠 내로 최종 결과를 전해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최종심? 공동수상? 기쁘기보단 당황스러웠다. 최종심에 올랐다는 소식보다 내 소설이 판타지로 분류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80%의 혼란스러움과 20%의 기쁨이 뒤섞여 그날 밤 나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 2011년 5월 25일 오후 5시 27분

 

 “축하합니다. 공동수상입니다.”

 업무 시간 내내 안절부절못하던 내게 어수웅 기자가 최종 당선소식을 알려왔다. 인터뷰 날짜도 잡혔다. 곧바로 출판사 ‘문학수첩’의 연락이 이어졌다. 출판사 담당자는 내게 “6월말 책이 출간되므로 빠른 원고 수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변 동료들의 축하도 이어졌다. 동료들은 상도 상이지만 1억 원이라는 상금에 열광했다. 공동수상이므로 1억 원이 아닌 5천만 원이며, 그나마 세금을 떼면 3천만 원 후반에 불과할 것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그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공기가 갑자기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께 당선 소식을 전화로 알렸다. 상금 액수는 말씀드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심드렁했다. 퇴근 후 고마운 사람 몇을 모아 함께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다. 그날 밤 나는 찜질방에서 외박했다.

 

 

- 2011년 5월 26일 오후 1시

 

 회사로 출근한 나는 아버지께 전화해 상금의 액수를 알렸다. 전화로 들리는 아버지의 리액션은 지난 몇 년간 아버지가 보여준 리액션 중 가장 격렬했다. 아버지는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는 아들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앞으로는 그러시지 않을 것 같다.

 

 

- 2011년 5월 30일 오후 3시

 

 그날 난 휴가를 내고 조선일보 측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간 지면으로만 만나왔던 어수웅 기자와 오프라인으로 처음 만났다. 인터뷰어-인터뷰이의 관계를 떠나 어수웅 기자는 언론사 밥을 나보다 한참이나 더 먹은 동종업계 선배다.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뷰 장소에 도착해보니 공동수상자가 나보다 한 시간 먼저 도착해 인터뷰를 마친 후 단독 사진 촬영 중이었다. 그는 67년생 부산 아저씨였다. 그와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며 함께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그는 나와 함께 사진 촬영을 마친 후 곧바로 부산으로 향했다. 책이 출간되면 그와 함께 서로의 책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고 싶다. 물론 내가 부산으로 그를 찾아갈 것이다. 대전은 내 고향이지만 솔직히 별 볼일 없다.

 인터뷰는 1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솔직히 무슨 이야기를 내뱉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중언부언은 기본이요, 버벅거림은 멈추질 않았다. 사진 촬영 시간도 꽤 길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때때로 나는 카메라가 위협적인 무기로 느껴진다. 왜 카메라 렌즈가 나를 향하면 몸은 뻣뻣하게 굳어져 버리는 걸까. 최종 당선 발표는 6월 7일로 잠정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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