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진군 신평면 남산리는 낮은 언덕을 감싼 소나무 숲의 모양새가 활(弓)을 닮아 궁터(弓攄)라고도 불린다. 궁궐과는 아무런 관련 없고 법정지명에서도 사라졌지만, 옛 지명은 여전히 이 지역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유효하다. 허만진 기자 hmj1985@cctoday.co.kr  
 

 

당진은 너른 들판의 대책 없는 연속이다. 도로를 따라 쫓아오듯 이어지던 산과 능선은 군계(郡界)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거짓말처럼 잦아든다. 높은 것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한여름 평지에선 빛깔 고운 볏잎이 뭇 산의 신록을 대신하는데, 바람을 따라 흐르는 새파란 물결은 쏟아지는 빛가루들을 흩어놓으며 매 순간 새로운 색의 층위를 이뤄낸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버려진 자리에서도 익숙하지 않은 이름을 가진 수많은 외떡잎식물들의 긴 잎이 볏잎의 리듬을 따라 일렁인다. 멀리서 들판을 바라보면 버려진 곳과 버려지지 않은 곳이 하나의 군집을 이뤄 바람에 실려 떠돈다. 가을의 황금빛 물결과는 또 다른 광활하고도 장쾌한 풍경이다.


대책 없이 너른 들판에서 사람은 대책 없어 불안하다. 내가 사방으로 뻗어 나갈 수 있다면 사방도 내게 뻗어 들어올 수 있다. 따라서 들판에 세간을 두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일터는 일터일 뿐 정주할 순 없는 공간이다. 사람들은 결국 몸 둘 바를 정하고 나서야 안도하기 마련이다. 이래저래 어딘가에 기대어 살 수 밖에 없는 게 사람이다.

당진군 신평면 남산리는 완만한 구릉지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다. 낮은 언덕을 덮은 소나무 숲의 모양새가 활(弓)을 닮아 궁터(弓攄)라고도 불린다. 궁궐과는 아무런 관련 없고 법정지명에서도 사라졌지만, 옛 지명은 여전히 이 지역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유효하다.

풍수상 산은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어줄 뿐만 아니라 그 생기가 바람에 흩어지는 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다. 세계 최고층 빌딩이 1㎞의 높이를 바라보고 건축 기술이 첨단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배산임수는 명당의 기본 조건이다. 하늘아래 저 홀로 새로운 것이란 없는 법이다. 
 

   
▲ 남산리 소나무 숲은 7.0ha 면적에 3150본의 거대한 수세를 갖추고 있다. 이에 지난 2007년 당진 관내 고대면 진관리 숲, 면천면 죽동리 숲 등과 더불어 '충남도 아름다운 100대 소나무 숲'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허만진 기자 hmj1985@cctoday.co.kr

산간 지대에 조성된 마을이건 평야 지대에 조성된 마을이건 간에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기본공식의 그림자 아래에 머물러 있음은 매한가지다. 남산리도 산과 숲이 마을을 감싸고 마을 남쪽으로 하천(남원천·南院川)이 흐르니 나름 배산임수의 꼴을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다른 마을들과 비교해 등지고 있는 것들의 해발고도 차이만 있을 뿐이다.

마을을 감싼 소나무 숲은 본디 자연적으로 조성된 뒤 주민들의 관리를 받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으로부터 이어지는 소나무들은 마을 앞을 병풍처럼 감싸며 살아있는 반(半) 구조물을 이룬다. 마을 안에선 바깥까지 시야가 닿아도 마을 밖에선 안쪽 상황이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전형적인 수구막이 숲이다. 
 

   
 

숲을 관리하기 시작한 주체는 200여 년 전 이 마을로 낙향해 뿌리내린 진주강씨(晉州姜氏)라고 전해진다. 이후 후손들의 대를 이은 관리로 지금까지 그 모습을 보전하고 있는 숲은 많은 마을 숲들이 그러했듯 근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수차례 위기를 넘겼다.

일제 강점기 때 남벌로 수난을 겪었던 숲은 한국전쟁 때에도 강제벌채로 몸살을 앓으며 이중고를 겪었다. 당시 마을까지 들이닥친 북한군은 소나무 숲을 작전기지이자 공습 피신장소로 활용했다.

숲으로 남한군의 폭격이 이어졌다. 훼손에는 피아의 구별이 없었다. 그 때문인 듯 숲엔 나이든 나무가 많지 않다. 숲을 이루는 나무의 대부분은 40~100년가량의 수령을 가진 젊은 나무들이다.

전국의 숱한 마을 숲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동안에도 남산리 소나무 숲은 용케 살아남았다. 평화를 찾은 숲은 다시금 주민들의 관리를 받으며 조금씩 제 모습을 회복해나갔다.

여기에 자원보전 필요성을 느낀 당진군도 2005년부터 숲 가꾸기 사업에 가세했다. 숲을 '우량 소나무 보존지'로 지정한 군은 엽고병 및 진딧물 방제를 실시하는 한편, 고사목과 설해를 입어 쇠약해진 나무를 제거해 밀생(密生)을 막고 잔가지를 쳐 아름다운 수형(樹形)의 유지와 건전한 생육을 도모했다.

그 결과 숲은 7.0ha 면적에 3150본의 거대한 수세를 갖추게 됐다. 지난 2007년엔 같은 관내 정미면 수당리 숲, 고대면 진관리 숲, 면천면 죽동리 숲 등과 더불어 '충남도 아름다운 100대 소나무 숲'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너른 들판의 초록 위에 포개지는 수많은 소나무들의 윤곽은 산세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수려한 맛을 자랑하는 여타 지역의 숲들과는 또 다른 멋을 풍긴다.

마을과 하천 사이에 만동포(萬同浦)라는 포구가 있었다는데 삽교천제방의 축조 이후 농경지로 변모돼 포구의 모습은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나 아득하다. 주민들의 세월에 마모된 기억 속에서 만동포는 긴 겨울을 버티게 만들어줬던 고마운 공간이다. 
 

   
▲ 마을과 하천 사이에 만동포(萬同浦)라는 포구가 있었다는데 삽교천제방의 축조 이후 농경지로 변모돼 포구의 모습은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나 아득하다. 허만진 기자 hmj1985@cctoday.co.kr

삽교천제방의 축조 이전의 만동포는 겨울이면 갈대로 무성했다고 한다. 당시 주민들은 포구의 갈대를 베어 땔감으로 사용했다는데, 이때 베어낸 갈대 묶음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 포구의 이름 앞에 만(萬)이라는 접두어가 붙었다고 한다. 불만 닿으면 사그라지는 한 가닥 한 가닥이 만이나 모여 겨울의 모진 시간을 매 순간 잇대었다.

그러나 포구도 사라지고 갈대로 불을 때는 주민들도 사라진 지금에 이르러 만동포는 희미해져가는 옛 지명일 뿐이다. 이제 농경지화 된 옛 포구는 매년 겨울이면 나락을 주워 먹는 겨울 철새들의 단골이다.

지분거리던 하늘이 새파란 것들 위로 빗방울을 쏟아낸다. 베롱나무 가지가 장마 속에서 붉게 타오른다. 방위와 원근을 가늠하기 어려운 곳으로부터 새소리가 들려온다. 문득 돌아보면 비었던 땅위에 어느새 이름 모를 녀석이 한 뼘이나 자라있다. 밟아도 밟아도 맹렬하게 솟아난다. 풀비린내가 사방에서 훅 끼쳐온다. 한 없이 길게 뻗은 마을 진입로 위에서 여름의 나날들은 이처럼 대책 없이 빽빽하고 발랄하다.

당진=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