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학산 자연휴양림은 지난 2001년 개장됐다. 102㏊ 구역면적에 하루 1000명의 수용인원을 갖추고 있으나 숙박시설은 따로 없다. 휴양림엔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 중인 소나무가 4000여 그루에 달한다. 또한 지난 2010년 천안시는 총 사업비 7억 5000만원을 투입, 휴양림 내 3만 5000㎡ 일대에 탐방로와 관찰로 시설을 갖춘 야생식물원을 조성했다. 건강적인 면뿐만 아니라 교육적인 면으로도 태학산 자연휴양림은 매우 훌륭한 공간이다. 허만진 기자 hmj1985@cctoday.co.kr  
 

햇살이 무방비로 쏟아졌다. 하늘이 무슨 색인지 가물가물해질 정도로 비를 쏟아냈던 구름은 오간 데 없고, 잔뜩 부풀어 오른 햇살이 젖은 숲 위로 내려 앉아 이파리 사이를 헤집었다. 젖었던 숲은 말라가며 기화열을 타고 비린내를 짙게 풍겼다.
전국 각지에 폭염주의보가 발효됐다. 폭염주의보가 끝나기 무섭게 또 다시 태풍이란다. 바싹 마른 이파리 위로 또 다시 비가 쏟아진단다. 바람도 더위에 지쳐 숨어버린 등산로 초입에서 잡티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다가올 태풍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폭염주의보도 다가올 태풍도 사람의 제어 영역 바깥의 일이니 피서를 할 땐 피서에 방비를 할 땐 방비에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다. 폭염주의보 속에서도 '천하대안(天下大安)'의 땅 사람들은 멀지 않은 태학산으로 하나둘씩 찾아오고 있었다.
 
태학산(泰鶴山)은 천안시 풍세면과 광덕면 그리고 아산시 배방면 일대에 능선을 걸친 나지막한 산이다. 산세가 춤을 추는 학의 모습을 닮아 '태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조선환여승람', '한글지명총람' 등은 산을 태화산(太華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전국 지도인 청구도(靑邱圖·1834년 김정호가 제작한 최초의 전국지도)는 태학산과 태화산을 구별해 표기하고 있다. 또한 인근 광덕산(廣德山)의 고찰 광덕사의 일주문 현판엔 '泰華山 廣德寺(태화산 광덕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광덕산이 태학산인지, 태학산이 태화산인지, 태화산이 광덕산인지 명쾌한 구분 없이 지금에 이르고 있지만 사람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다. 여름이면 자맥질하고픈 이들은 태학산인지 광덕산인지 모를 계곡으로 향하고 삼림욕하고픈 이들은 태학산인지 태화산인지 모를 휴양림으로 향한다.

태학산 자연휴양림은 지난 2001년 개장됐다. 102㏊ 구역면적에 하루 1000명의 수용인원을 갖추고 있으나 숙박시설은 따로 없다. 통나무 집 2동과 야영장이 마련돼 있지만 숙박용으로 쓰이진 않는다. 뿐만 아니라 산 아래엔 딱히 식당 등 유흥업소도 많지 않다. 따로 입장료를 받진 않지만 음식물 반입 외에 취사가 허용되진 않는다. 휴양림의 편의시설들도 낮 동안 잠시 머물다갈 수 있는 장소 위주로 조성돼 있다. 때문에 휴양림을 찾는 이들은 주로 산책 및 당일치기 나들이를 나온 가족단위 관광객이나 등산객이 대부분이다. 관광버스를 타고 '묻지마'식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숲은 고요한 편이다.

   
▲ 보물 제407호인 천원삼태리마애불(天原三台里磨崖佛) 고려후기에 조각된 불상이다. 대개 마애불들은 외침을 막아달라는 기원을 담아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는데, 이곳 마애불은 서쪽이 아닌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허만진 기자 hmj1985@cctoday.co.kr

밤새워 모닥불을 피우며 별을 헤는 재미는 없지만 잔디에 돗자리를 깔고 가족끼리 모여 앉아 도시락을 까먹는 즐거움도 캠핑의 그것에 못지않다. 숲길을 따라 얕은 곡류천이 흐른다. 인근 광덕산 계곡에 몸을 적시는 일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솔그늘 아래서 흐르는 물에 탁족(濯足)하는 일도 소소한 즐거움이다.

휴양림 입구에 들어서서 걷다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굵은 소나무들이 뿜어내는 청신한 향으로 코끝이 싸해진다. 휴양림엔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 중인 소나무가 4000여 그루에 달한다. 이들이 뿜어내는 방대한 양의 피톤치드(phytoncide·숲 속의 식물들이 만들어 내는 살균성을 가진 모든 물질의 통칭) 때문에 숲은 아토피를 앓는 자녀를 가진 부모들의 단골이다.

지난 2010년 천안시는 총 사업비 7억 5000만원을 투입, 휴양림 내 3만 5000㎡ 일대에 탐방로와 관찰로 시설을 갖춘 야생식물원을 조성했다. 야생식물원엔 철쭉, 비비추, 약용식물, 습지식물, 원추리, 나리 등 주제별로 10개의 공간이 목재 관찰 데크(462m)를 따라 늘어서있다. 지금은 비비추, 원추리, 나리가 한창이다. 특히 스텔라 원추리의 샛노란 빛깔이 곱다. 이밖에도 겹철쭉, 조팝나무, 황매화, 무늬 개나리, 병아리 꽃나무 등 36종 4380본의 관목류와 기린초, 금낭화, 노루오줌, 매발톱, 바위취, 물레나물, 부채꽃 등 119종 7만 9710본의 다양한 야생화가 계절마다 피고 지며 소박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숲길에선 청설모와 다람쥐, 꿩 등 야생동물과의 만남도 잦은 편이다. 건강적인 면뿐만 아니라 교육적인 면으로도 태학산 자연휴양림은 매우 훌륭한 공간이다.

   
 
포장된 숲길이 다하는 지점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정상이 낮은데다(455m) 산세가 유순해 숲을 찾은 사람들은 대개 태학산 산행도 겸한다.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도 어지간해선 산위에서 징징대지 않는다.

산행로 들머리엔 태고종(太古宗) 사찰 태학사(泰鶴寺)와 조계종(曹溪宗) 사찰 법왕사(法王寺)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태학사 뒤편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오르면 태학산의 명물 천원삼태리마애불(天原三台里磨崖佛·보물 제407호)과 만난다. 굳어 있는 표정 위로 눈꼬리가 길게 양 옆으로 뻗어 나간다. 얼굴은 돋을새김으로 처리된 반면, 신체 부위의 윤곽을 그리는 것은 얕은 선들이다. 전형적인 고려후기 마애불 조각수법이다. 대개 마애불들은 외침을 막아달라는 기원을 담아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는데, 이곳 마애불은 서쪽이 아닌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광덕산을 중심으로 주변 산들이 빚어내는 운해(雲海)가 태학산 아래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마애불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지만 확인되진 않는다. 가슴까지 들린 불상의 두 손 중 오른손이 왼손 위에 올라와 있다. 이는 고려시대 유행했던 미래불(未來佛) 미륵(彌勒)의 수인(手印)이다. 바위에 정을 들이댔던 옛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은 짐작되지만 그 내용까지 드러나진 않는다. 세월의 버캐 낀 마애불은 아직도 남쪽의 운해를 바라보고 있다. 마애불을 지나면 나무계단이 이어지는데 정상까진 30여분 가량 소요된다. 정상에 오르긴 쉽지만 조망할 수 있는 풍경은 밋밋한 편이다. 딱 가족끼리 부담 없이 오를만한 산이다.

하산하는 도중 마애불 아래로 이어지는 산길에서 왼쪽으로 발길을 살짝 틀면 법왕사에 다다른다. 법왕사 경내엔 천연동굴로 만들어진 굴법당이 있다. 폭염주의보에도 굴법당은 서늘한 공기로 더운 몸을 감쌌다. 법당 안엔 수십여 개의 촛불들이 인공조명을 대신하는 데 그 모습이 자못 경건하다. 굴은 좁은 계단을 따라 2층까지 이어져 신비로움을 더한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좁은 굴 벽에 팔꿈치라도 부딪히면 말도 못하게 '마이' 아프다.

굴에서 빠져나오자 작열하는 햇살이 새삼 새롭다. 사찰 앞 화단에 만개한 상사화의 여린 분홍빛 꽃잎이 처연했다. 잎이 지면 꽃이 피고, 꽃이 피면 잎이 지고… 한 몸에 붙어있으면서도 서로를 만나지 못하는 허랑한 기다림과 그리움 너머로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했다. 여름의 절정이 저물어 가는 밑바닥에서 달개비가 보랏빛 앙증맞은 잎으로 가을 풍경을 조금씩 길어 올리고 있었다.

천안=정진영 기자 crazyturtle@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