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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기사 및 현장/앨범 리뷰

정준일 [ELEPHANT]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8. 2. 17.

원문 링크 : http://www.groovers.kr/column/LOTUSXl



앨범명

정준일 [ELEPHANT]

정준일의 새 EP에 밴드 크래쉬의 안흥찬과 넥스트의 김세황으로 참여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과연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기대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른바 ‘90년대 발라드의 적자’가 헤비메탈로 전향하는 전위적인 모습을 상상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스래시 메탈의 그로울링과 서정적인 발라드가 어떻게 부조화를 이룰지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누가 결과물에 가장 가까운 상상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상상하든 이번 EP는 정준일이 그동안 들려준 음악 중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파격적인 결과물이니 말이다. 


이 앨범은 다소 쓸쓸한 느낌을 담아냈던 전작 EP [UNDERWATER] 이상으로 어둡고 우울하면서도 파괴적이다. 앨범의 문을 여는 연주곡 ‘유월’에서 느낀 익숙함은 ‘Say Yes’의 불온한 가사와 다소 거칠어진 보컬에서 당혹감으로 바뀐다. "삶이 지옥 같은 건"이라고 분명하게 적혀 있는 가사가 "삶이 X 같은 건"이라고 들리는 건 단지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원망과 집착을 어지럽게 오가는 정신분열적인 ‘Hell O’의 가사 또한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제목만큼이나 불온하다. 불온함은 ‘Whitney’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펙트를 강하게 걸은 베이스 피킹에 이어지는 강렬한 기타 리프와 울부짖는 보컬은 "진짜 정준일 맞아?"라는 놀라움과 함께 EP의 주인공을 다시 한 번 살피게 된다. 광기로 번뜩이다 갑자기 서정적인 분위기로 돌변하는 후반부는 패륜(?)에 가까운 가사로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이쯤 되면 마지막에 배치된 쓸쓸한 연주곡 ‘Walk’가 새삼 뜬금없게 느껴진다.


정준일은 이 EP를 발표하며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어요"라는 간단한 소감을 남겼다. 앞뒤에 아무런 내용도 없다. 익숙한 분위기의 연주곡을 앨범의 처음과 끝에 배치하고 그 안에 파격을 담은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새 앨범을 모두 들은 뒤 당혹감은 호기심으로 바뀐다. 정준일은 다음에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뮤지션은 그 자체로 생명력과 가치를 가진다. (정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