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2007년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장을 발표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나는 앨범 추천, 선정, 리뷰 작성 작업에 참여했다.
김수철 1집 발표를 끝으로 내가 리뷰 작성에 참여한 앨범은 모두 발표됐다.
내가 리뷰를 작성한 앨범은 다음과 같다.
32위. 김수철 1집
51위. 크래쉬 1집 [Endless Supply of Pain]
52위. 서태지와 아이들 2집
94위. 장기하와 얼굴들 1집 [별일 없이 산다]
대한민국에 본격적으로 헤비메탈을 들려주는 아티스트가 등장한 지 30여 년 됐다. 길다고도 짧다고도 말할 수 없는 세월 동안 걸출한 아티스트가 적지 않게 배출됐고, 그들이 발표한 몇몇 앨범은 오늘날 선구적인 작품으로 추앙 받고 있다. 그러나 해외의 오리지널이 들려주는 훌륭한 사운드는 좀처럼 따라잡을 수 없는 한계였다. 잘 만든 기타 리프와 훌륭한 연주도 조악한 녹음 기술 앞에선 모기 울음소리처럼 변해 오리지널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촌티를 풍겼다. 헤비메탈이란 장르를 이해하는 녹음 엔지니어가 부재한 상황에선, 아티스트가 아무리 녹음에 신경 써도 가요에 디스토션을 강하게 건 기타 연주를 어색하게 추가한 수준을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쉽게 이뤄지지 않는 훌륭한 사운드를 향한 열망은 아티스트들에게도 국내 록 마니아들에게도 깊은 콤플렉스로 자리 잡았다.
후발주자에게 오리지널과의 비교는 끊어낼 수 없는 천형이다. 후발주자가 오리지널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오리지널을 넘어서든지, 아니면 오리지널과 다른 새로운 길을 개척하든지. 크래쉬의 데뷔 앨범은 두 가지 모두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한국 헤비메탈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세풀투라(Sepultura)의 막스 카발레라(Max Cavalera)를 연상케 하는 안흥찬의 압도적인 그로울링, 윤두병의 공격적인 기타 리프와 날카로운 솔로의 조화, 정용욱의 시종일관 몰아치면서도 정교함을 잃지 않는 드러밍. 국내 록 마니아들은 해외 유수의 밴드와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폭발적인 사운드를 선보인 이 앨범에 열광했다. 사운드를 만들어낸 일등공신은 프로듀서 콜린 리처드슨(Collin Richardson)이다. 카니발 콥스(Carnibal Corps), 네이팜 데스(Napalm Death), 카르카스(Carcass) 등 정상급 헤비메탈 밴드와 작업했던 그의 노하우는 크래쉬의 데뷔 앨범에도 발휘돼 사운드의 격을 높였다. 한국어는 헤비메탈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입견도 ‘My Worst Enemy’, ‘최후의 날에’와 같은 곡 앞에선 힘을 잃었다. 이 앨범은 한국 밴드도 오리지널 이상의 사운드를 들려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로도 훌륭하게 가사를 쓸 수 있다는 가능성을 결과물로 보여줬다.
이 앨범의 혁신적인 사운드는 국내 헤비메탈 신의 지형도까지 바꿨다. 콜린 리처드슨이 사운드를 뽑아내기 위해 사용한 주요 장비가 고작 마샬(Marshall) 앰프와 보스(Boss)의 메탈존(Metal Zone) 이펙터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녹음 전에 이펙터를 쌓아놓는 게 관행이었던 국내 헤비메탈 계는 충격에 빠졌다. 이 앨범으로 인해 높아진 국내 록 마니아들의 눈높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해외의 유명 프로듀서와 엔지니어를 초빙해 앨범을 녹음하는 밴드들이 늘어났다. 이 앨범은 국내 헤비메탈 신에 사운드의 상향 평준화를 불러온 시발점이었다. 이 앨범을 기점으로 국내 헤비메탈 신에서 비주류였던 스래시 메탈(Thrash Metal) 등 익스트림 메탈(Extreme Metal)이 단숨에 주류를 위협하게 된다. 너바나(Nirvana)로부터 촉발된 얼터너티브 록(Alternative Rock) 열풍이 해외 헤비메탈 신을 고사시키는 가운데에서도, 국내 헤비메탈 신에선 익스트림 메탈이 상당 기간 힘을 발휘했다. 이 모든 게 크래쉬의 데뷔 앨범 한 장이 남긴 파장이었다.
추천곡: ‘My Worst Enemy’
한국어가 헤비메탈과 어울리는 언어인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여전히 한국어보다 영어로 가사를 쓰는 국내 헤비메탈 밴드들이 많다. 하지만 적어도 이 곡 앞에선 한국어가 헤비메탈과 어울리기 어렵다는 말은 하기 어렵지 않을까. 이 앨범에는 ‘My Worst Enemy’의 가사를 영어로 쓴 버전도 함께 실려있다. 한국어 버전과 영어 버전 중 어느 곡이 더 끌리는가. 이 곡은 잘 만든 한국어 가사의 맛을 느낄 수 있는 필청 트랙이다.
- writer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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