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2007년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장을 발표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나는 앨범 추천, 선정, 리뷰 작성 작업에 참여했다.
김수철 1집 발표를 끝으로 내가 리뷰 작성에 참여한 앨범은 모두 발표됐다.
내가 리뷰를 작성한 앨범은 다음과 같다.
32위. 김수철 1집
51위. 크래쉬 1집 [Endless Supply of Pain]
52위. 서태지와 아이들 2집
94위. 장기하와 얼굴들 1집 [별일 없이 산다]
지난 2005년 7월 30일 MBC ‘생방송 음악캠프’에서 벌어진 성기 노출 사건은 당시 새로운 스타를 찾지 못하고 침체를 거듭하던 인디신에 투하된 핵폭탄급 재앙이었다. 일명 ‘카우치 사건’으로 불리는 이 날 사건은 대한민국 방송사와 대중음악사에 지워지지 않을 흑역사를 남기며 인디신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홍대 퇴폐공연 블랙리스트를 만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을 정도로 ‘카우치 사건’이 남긴 충격과 파장은 크고 깊었다.
‘모든 멸종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페름기 대멸종’ 이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생명체들은 중생대에 이르러 진화하고 번성하며 지구를 지배했다. 한 세대의 종말은 새로운 세대의 시작을 알리는 법이다.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하 장얼)이 지난 2009년에 발표한 첫 정규앨범 [별일 없이 산다]는 펑크와 모던록으로 양분돼 있던 인디신에 새로운 세대와 음악이 출현했음을 알리는 동시에 추락했던 인디신의 이미지를 반전시킨 신호탄이었다.
표정 없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랩인지 노래인지 모를 것을 부르는 프런트맨, 양옆에서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말없이 흐느적거리는 댄서 두 명. 장얼과 마주친 대중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웃긴 녀석들’이었다. 장얼이 가내수공업으로 제작한 데뷔 싱글 ‘싸구려 커피’는 온라인상에서 얻은 입소문을 타고 인디신에선 보기 드물게 1만 장 이상 판매고를 올렸다. ‘웃긴 녀석들’을 향한 대중과 매체의 관심도 높아졌다. 음악을 듣고 공유하는 이들이 늘어나면 그 음악의 이면으로 파고드는 이들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장얼의 음악에서 유머와 키치를 걷어내면 상당히 괜찮은 내용물이 담겨 있다는 걸 포착한 이들이 많아졌다. ‘웃긴 녀석들’이 ‘인디계의 서태지’란 수식어를 얻는 순간도 그때 찾아왔다.
이 앨범에 담긴 음악은 오랜 세월 동안 맥이 끊겼던 70년대 한국의 포크와 록에 닿아있다는 점에서 개성적이었다. 이는 영미권 팝을 이상향으로 설정하고 그 뒤를 쫓아왔던 기존 뮤지션들과 차별화된 역발상이었다. 이 앨범의 대표곡 ‘싸구려 커피’와 ‘달이 차오른다, 가자’를 비롯해 ‘오늘도 무사히’, ‘삼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나를 받아주오’ 등의 곡에서 드러나는 새롭게 재해석된 과거의 흔적에 주목한 이들은 장얼을 ‘산울림의 재림’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 앨범의 또 다른 매력은 낭만과 거리가 먼 청춘의 현실을 한국어의 맛을 살린 일상의 언어로 풀어낸 가사다. 장얼의 생활밀착형 가사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어진 장기 경기침체와 실업률 증가와 맞물려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 온다/눅눅한 비닐장판에/발바닥이 쩍하고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는 ‘싸구려 커피’의 가사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며 피식 웃었던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힘내라고 응원하는 노래보다 사소한 일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가사가 더 위로가 돼 주곤 한다. 슬플 때 슬픈 영화를 보는 게 위로가 되듯이 말이다. 장얼의 음악은 기성세대에게 기시감을 불러일으켰고, 청년세대에겐 신선함을 선사했다. 장얼은 세대를 아우르는 음악을 들려줬던 첫 인디 뮤지션이었다.
[별일 없이 산다]는 5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이 앨범의 성공은 인디 뮤지션이 자신의 음악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에 손상을 가하지 않는 범위에서 생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음악 작업, 이른바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 앨범의 성공을 바탕으로 장얼이 2년 후에 내놓은 정규 2집 [장기하와 얼굴들]은 2012년 제9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역대 최다 부문 수상을 하며 장얼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져줬다. 장얼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은 현재진행형이다.
추천곡: ‘별일 없이 산다’
장기하는 장얼의 음악에 ‘루저’의 정서가 담겨 있다는 일각의 평가를 부정한 바 있다. ‘4전5기’ 신화로 유명한 복서 홍수환은 "누구에게나 ‘한방’은 있다"고 말했다. ‘별일 없이 산다’는 일상에 치어 고단한 청춘에게도 ‘한방’이 있다고 오기를 드러낸다. "네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오늘 밤 절대로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진 못할 거다/그게 뭐냐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뭐 별다른 걱정 없다/나는 별일 없이 산다/이렇다 할 고민 없다". 자기연민보다 그런 오기가 더 건강한 세상을 만드는 힘이 아닐까.
- writer 정진영
'대중음악 기사 및 현장 > 앨범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미조 새 앨범 [바람같은 날을 살다가] (0) | 2020.11.12 |
---|---|
그레이트볼스 1집 [모두가 로큰롤] (0) | 2018.09.22 |
<명반 100> 52위. 서태지와 아이들 2집 (0) | 2018.09.22 |
<명반 100> 51위. 크래쉬 1집 [Endless Supply of Pain] (0) | 2018.09.22 |
<명반 100> 32위. 김수철 1집 (0) | 2018.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