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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한계 없는 상상력… 기술·인간·시간에 던진 질문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19. 5. 29.

테드 창의 작품집 '숨'.

거두절미하고 정말 재미있고, 많은 상상할 거리를 준다.

강력 추천!





테드 창 작가는 새 작품집 ‘숨’을 통해 새로운 기술이 변화시킨 세상과 그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변화를 보여준다. 소설마다 창의적으로 변주된 설정과 전개가 흥미를 더한다. Pixabay 제공

- 숨 /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세계 최고 SF작가의 ‘귀환’

두번째 작품집 17년만에 선봬

美일간지 “출간 자체가 사건”

피할 수 없는 기술발전앞에서

‘최선의 선택’생각할 기회 줘

마지막 부분에 창작노트 실어

독자들의 이해 친절하게 도와


과학소설(SF)이 예언된 미래라고 가정한다면, 세계 최고의 예언자로 꼽힐 인물은 아마도 중국계 미국인 SF 작가 테드 창일 것이다. 4번의 휴고상, 4번의 네뷸러상, 4번의 로커스상 수상이란 화려한 경력이 말해주듯이 작가는 현재 세계 최고의 SF 작가로 추앙받고 있다. 특히 작가는 현재 과학 지식의 연장 선상에서 과학적 정합성과 논리를 중시하는 ‘하드 SF’의 대가다. 세계적인 과학 학술지 ‘네이처’가 지면을 내줄 정도로 작가의 작품은 학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작가의 대표 단편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지난 2014년 할리우드에서 ‘컨택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돼 호평을 받으며 대중성까지 증명했다.


이 예언자의 유일한 단점은 지나치게 과작이란 점이다. 지난 1990년 데뷔 이래 작가가 내놓은 작품은 스무 개도 안 되는 중·단편이 전부다. 장편은 한 편도 없다. ‘숨’은 작가가 17년 만에 내놓는 작품집이자 두 번째 작품집이다. 특히 이번 작품집에 수록된 중·단편 9편 중 ‘옴팔로스’와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았던 신작이다. 미국 뉴욕주의 일간지 ‘뉴스데이’가 “출간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란 낯 뜨거운 찬사로 화답한 이유도 그만큼 작가의 새로운 작품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독자가 많다는 방증이다.

작품집의 일관된 주제는 새로운 기술이 변화시킨 세상과 그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변화다. 작가는 소설마다 설정과 전개를 창의적으로 변주해 같은 주제라고 믿기 어려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작품집의 문을 여는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마치 ‘아라비안나이트’를 연상케 하는 장소와 배경 속에서 벌어지는 시간 여행을 그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미래를 바꿀 수 없고, 그저 과거를 더 잘 알게 될 뿐이란 설정은 기존의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SF보다 신선하다.

표제작 ‘숨’은 ‘엔트로피’ 개념에 착안한 작품이다. ‘엔트로피’는 우주의 물질과 에너지 총량은 일정한데, 유용한 에너지를 사용하면 열과 같은 쓸모없는 에너지로 전환돼 결국 우주는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공기를 생명의 원천으로 알았던 기계 인간은 연구 끝에 기압이 동력의 원천이고, 기압이 평형상태에 도달하면 기계 인간도 최후를 맞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작품은 무분별하게 에너지를 사용하는 인류를 향한 작가의 경고로 들린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유대 관계를 심도 있게 다룬 중편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애완동물 ‘디지언트’는 소프트웨어에 불과하지만, 오랜 학습을 통해 인간처럼 자의식을 갖게 된다. 작품 속에서 ‘디지언트’와 주인 사이의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다를 바 없다. ‘디지언트’가 활동할 수 있는 가상 플랫폼이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소수의 주인은 이들을 다른 플랫폼으로 이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금을 모은다. 현재 인간의 사고체계를 모사한 인공지능인 ‘딥 러닝’ 기술이 가파른 발전 속도를 보여, 소설 속 미래가 단지 소설로 끝나지 않으리란 예감을 강하게 준다. 문장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영상은 이 소설의 영화화를 기대하게 한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우리가 완전무결하고 정확한 기억을 가지는 게 과연 옳은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소설의 화자는 가까운 미래에 살고 있는 기자, 아프리카 서부에 사는 티브족 소년 사이를 교차한다. 기자는 보고 듣는 모든 것을 기록하는 장치를 통해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한 사건이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유럽인 덕분에 문맹에서 벗어난 티브족 소년은 자신의 부족이 다른 씨족으로 합류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자 주변인의 기억과 유럽인이 남긴 기록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소설은 피할 수 없는 기술의 발전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생각할 기회를 준다.

‘우리가 해야 할 일’과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고찰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 인류에게 불러일으킬 파장에 관한 독백이다. 비록 미래가 정해져 있을지라도, 우리가 무언가를 믿고 선택하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인상적이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의 이론적 바탕은 평행우주이론이다. 이 소설은 여러 세계에 여러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가 무슨 선택을 하든 그와 정반대의 선택을 하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고 상황을 설정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한 번 독자에게 질문한다.

작가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창작 노트를 실어 독자의 이해를 친절하게 돕는다. 창작 노트는 소설에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을 짧고 명료하게 정리해주는 한편, 한계를 가늠하기 어려운 작가의 상상력에 혀를 내두르게 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읽힌다. 아침에 지각하고 싶지 않다면 평일보다 주말에 집어 드는 게 좋다. 520쪽, 1만6500원.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