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이란 최첨단 과학의 산물이 아닌가하는 막연한 생각을 깨준 책이다.
신약 개발의 기본은 선사시대나 지금이나 수많은 물질을 조사해 효과가 있는 물질을 찾는 지난한 작업이란 걸 알게 됐다.
그 과정에서 지독하게 운이 작용하며, 심지어 지금도 인체에 작용하는 기전을 파악하지 못하는 약도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제약업계에 30년 넘게 일한 사람이 저자여서 내용이 전문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쉽다.
매우 재미 있는 책이다.
문화일보 10월 31일자 21면 톱에 리뷰 기사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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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운명을 바꾼 약의 탐험가들 / 도널드 커시·오기 오거스 지음, 고호관 옮김 / 세종
플레밍, 우연히 페니실린 발견
괴혈병 치료법 찾은 것도 행운
대형 제약사 신약 개발까지
평균 14년·15억 달러 소요
연구 둘러싼 일화도 흥미진진
제약산업 30년 경험살려 설명
대박 노린 한탕주의엔 경고장
약은 언제부터 약으로 쓰여왔으며, 효능은 어떤 과정을 거쳐 발견된 걸까. 약의 재료는 무엇이며, 어떤 원리로 인체에 작용할까. 오늘날 인류는 매 순간 많은 약을 소비하지만, 이 같은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현대에 이르러 비약적으로 발전한 과학의 산물이란 것이 평범한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의 답변이 아닐까. 이 책은 예나 지금이나 신약 발견은 우연과 운, 시행착오의 결과물이라고 단언한다. 제약 산업에 30년 넘게 종사했던 저자는 신약 발견의 중요한 역사를 돌아보며 약의 기원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저자는 온갖 위험을 감수하며 약을 찾아 헤매는 사람을 ‘약 사냥꾼’으로 정의한다. 제일 먼저 소환되는 ‘약 사냥꾼’은 지난 1991년 알프스 산맥 빙하에서 발견된 미라 ‘아이스맨 외치’다. 과학자들은 ‘외치’의 내장에서 편충에 감염된 흔적을 찾아냄과 동시에, 소지품에서 자작나무 버섯 자실체를 발견한다. 자작나무 버섯은 편충을 치료하는 성분을 갖고 있다. ‘약 사냥꾼’의 역사가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외치’를 시작으로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 아편 진통제, 아스피린, 인슐린, 항생제, 당뇨병약, 피임약, 고혈압약, 정신과 치료제 등에 이르기까지 신약 발견에 큰 영향을 미친 우연의 역사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19세기에 루이 파스퇴르가 세균 이론을 발전시키기 전에는 누구도 세균이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20세기에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페니실린은 알렉산더 플레밍이 우연한 계기로 발견한 물질이었다. 괴혈병, 항우울제를 치료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과정 또한 순전히 행운이었다.
저자는 ‘외치’나 대형 제약회사나 신약을 찾는 근본적인 기술은 같다고 말한다. 끈질기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물질을 조사하고, 그중 한 가지만이라도 효과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대형 제약회사가 신약을 개발하는 데 평균 15억 달러를 투자하고 14년의 세월을 쏟는다는 통계는 신약 개발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신약 발견의 역사를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요소는 저자의 경험담이다. 저자는 자신이 제약 산업 현장에서 보고 겪은 경험을 곳곳에 녹여내 생생함을 더한다. 저자가 근무했던 제약회사가 재조합 DNA로 만든 인슐린 시판 제의를 거절해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줄 신약을 놓친 사연, 저자가 엉뚱한 갯벌에서 온종일 신약을 위한 미생물을 찾다가 허탕을 친 일 등 신약 개발을 둘러싼 극적인 일화는 블록버스터 영화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신약 개발이 인류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지만, 제약 산업에는 거대 자본이 투입되므로 부정행위가 따라다니기 쉽다. 저자는 신약 개발 성공이 막대한 이익으로 이어지므로 경쟁, 불화, 한탕주의 등이 개입될 여지가 크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신약 개발을 영화 제작에 비유한다. 저자는 낮은 성공 확률에도 불구하고 고품질 영화를 꾸준히 내놓는 대형 영화사를 예로 들며, 대형 제약회사가 과학자들에게 창조적 자유를 주면 뛰어난 신약 개발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다소 낭만적인 결론처럼 들리지만, 부작용을 상쇄할 만큼 신약 개발이 인류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바람 아닐까.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우연과 시행착오로 점철된 ‘약 사냥꾼’의 역사가 마냥 흥미롭게만 다가오지 않는 이유다. 344쪽, 1만7000원.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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