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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이명현, 이은희, 김창규, 이종필, 정경숙 소설집 '떨리는 손'(사계절)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0. 11. 29.



이 소설집은 천문학자, 물리학자 등 과학자들이 직접 쓴 SF 단편을 모았다.
기대했던 대로 과학자들이 펼쳐낸 상상의 세계는 흥미로웠다.
인간의 의식을 디지털로 옮기는 기술은 먼 우주를 동경하는 인간의 유한한 삶을 확장한다. 이를 소설로 다루는 과정에서 폴리아모리(다자 간 사랑), 존엄사 등 민감한 주제가 더해져 논의의 영역을 넓힌다.
외계인이 화자로 등장해 제3자 입장에서 인간을 바라보며 여성에게 미뤄진 육아 문제의 공정성을 화두로 던지기도 한다.
산소가 치명적인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불시착해 벌이는 생존 경쟁 묘사는 긴장감이 넘치고, 양자역학과 평행우주를 가상의 역사와 엮어 펼쳐내는 이야기도 눈길을 끌었다.

소설에 익숙한 작가가 아닌 만큼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았다.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아는 분야를 지나치게 자세히 설명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등장인물이 관련 과학 지식을 길게 설명하는 모습은,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도 적에게 자세하게 초식을 설명하는 무협지의 등장 인물 같아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 부분은 더 많은 작품을 쓰면 자연스럽게 고쳐질 부분이다.

이 소설집을 읽으며 더 많은 직업인이 소설을 써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소설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이야기다.
국내 소설이 독자로부터 외면당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야기가 뒷전으로 밀려났기 때문이 아닐까.
소설에서 문체, 문장의 미학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 않은 이야기가 과연 독자의 마음을 얼마나 열 수 있을까.
당장 나부터도 방구석에서 출발해 온갖 고민을 하다가 다시 방구석으로 돌아오는 소설(특히 단편소설일수록 그런 경향이 심하다)은 문장이나 구성이 아무리 좋아도 참아내기가 힘들다.

이건 꽤 승산이 있는 도전이다.
체육, 음악, 미술, 시와 달리 소설에는 천재가 없다는 게 이 바닥의 말이다.
엉덩이가 가장 중요하다.
베스트셀러도 아니고 출판사가 밀어줬던 소설도 아닌 '침묵주의보'가 드라마 판권을 팔았을 때, 나는 기획사에 왜 내 소설을 샀느냐고 이유를 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언론계를 드라마로 다루려고 관련 소설을 다 찾아봤는데, 내 소설보다 더 리얼하게 언론계를 묘사한 작품이 없었다는 것이다.

정치판, 공무원 세계, 중소기업의 실상, 교육현장 등. 주위를 돌아보면 흥미로운 소재가 수두룩하다.
해당 분야에 깊이 발을 들였던 작가가 쓴 글은 그렇지 않은 작가가 쓴 글보다 디테일이 강하다.
간접 경험이나 머릿속으로 상상해 써 내려가는 글과 비교해 무게감이 다르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던 직업인이 쓴 소설이 많아지면, 국내 문학 시장의 지형도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