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의 '마'가 악마를 뜻하는 '마(魔)'가 아니라 마비를 뜻하는 '마(痲)'라는 사실을 이 책으로 처음 알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되니, 내가 마약에 관해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지 궁금해져 책에 훅 빨려들었다.
이 책은 내가 마약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편견도 가지고 있음을 일깨워줬다.
매우 흥미롭고, 놀라우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긴 책이다.
이 책은 초반에 꽤 충격적인 가설을 소개한다.
인류가 환각물질을 포함한 버섯을 먹으면서, 한마디로 약을 빨기 시작하면서 동물의 차원을 넘어서게 됐다는 가설이다.
검증된 가설은 아니지만, 나름 내세우는 증거에 꽤 설득력이 있다.
구석기인이 살던 동굴에 환각을 유도하는 버섯이 벽화로 그려져 있고, 네안데르탈인 유적에서도 마약성 식물이 발견된다.
아울러 저자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마약성 식물이 종교의식과 의료 행위에 쓰였으며, 마약이 지금처럼 터부시된 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님을 밝힌다.
그리고 그 배경에 종교와 정치, 경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드러낸다.
이 책은 교양서(?)라는 타이틀에서 엿보이듯이 마약에 관한 상세한 지식 전달도 잊지 않는다.
저자의 입심이 꽤나 세다.
덕분에 심각한 내용이 심각하게 읽히지 않는다는 부작용(?)이 있다.
저자는 마약의 종류부터 천연마약과 합성마약의 구분법, 마약의 효과, 영화나 드라마 등을 통해 소개되는 마약의 역사, 마약과 관련한 온갖 재미있는 일화 등을 유쾌하게 설명한다.
1954년 월드컵 결승전에 독일 선수들이 약을 빨았다는 등의 이야기를 외면하긴 쉽지 않을 테다.
이 같은 장치는 마약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이 거부감 없이 이뤄지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저자는 마약을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는 데에 의문을 제기한다.
마약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관리하면, 마약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고, 마약에 세금을 걷어 마약 관련 정책에 사용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의 강력한 반발을 살만한 태도다.
그러니 누가 봐도 가명인 이름을 저자의 이름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을 테다.
하지만 저자가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근거로 들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저자는 네덜란드, 미국, 포르투갈 등 세계 각국의 사례와 통계를 바탕으로 마약을 법으로 금지했을 때 투입되는 사회적 비용이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크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가장 설득력 있었던 부분은 디딤돌 효과에 관한 의문이다.
이미 많이 알려졌지만, 대마는 술이나 담배보다 훨씬 안전하고 중독성도 적다.
그런데도 대마가 법적으로 금지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대마가 더 강한 효과를 보이는 마약으로 빠져드는 관문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나 또한 지금까지 그렇게 알아 왔기 때문에, 대마를 금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 왔다.
저자는 술을 예로 들어 디딤돌 효과에 의문을 제기한다.
디딤돌 효과가 사실이라면, 맥주와 같은 저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맥주를 버리고 소주에 이어 위스키 같은 고도주에 빠져들어야 한다.
하지만 맥주를 즐기는 사람이 다들 위스키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맥주는 싫어하지만 막걸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위스키를 싫어해도 와인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술에 관한 취향이 서로 천차만별이란 걸 모두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마약 또한 서로 천차만별이어서 마약이란 하나의 범주로 묶기가 곤란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다양한 근거를 바탕으로 대마초를 한 사람이 반드시 헤로인이나 코카인에 손을 대는 건 아님을 밝힌다.
이 부분에선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마약 중독자를 사회에 복귀시키는 방안에 관한 설명은 시사점이 크다.
세계대전 당시 많은 군인이 진통제로 몰핀을 처방받았다.
몰핀 중독자가 쏟아졌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전쟁 후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몰핀에 의존한 군인은 소수였다.
사회 안전망과 복지, 충분한 여가를 통해 심신의 안정이 이뤄지면 자연스럽게 마약에 손을 대지 않게 된다...
저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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