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지 않는 눈으로 뒤덮인 세상.
이 독특한 설정만으로도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렬한 이미지를 펼쳐낸다.
방부제처럼 수분을 흡수하면서 살갗에 닿으면 발진을 일으키는 녹지 않는 눈.
소설 속 재난의 모습이 코로나 펜데믹과 겹쳐 보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소각하거나 묻어야 사라지는 눈이 내린 지 7년이 넘었지만, 세상은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다.
재난 이전부터 쓰레기 매립지를 가지고 있었던 도시로 녹지 않는 눈이 몰려들었고, 가난한 청춘들은 눈을 처리하는 작업에 소모품처럼 쓰인다.
이 소설은 눈 소각장에서 재회한 중학교 동창 '모루'와 '이월'의 시선을 교차해 환경문제, 자연재해, 노동인권, 동물권, 님비현상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로 이야기의 가지를 뻗는다.
실종된 '모루'의 이모를 추적하는 과정이 소설의 중심에 놓여있지만, 그 과정이 뚜렷하지 않아서 미스터리 스릴러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소설은 갑작스러운 재난을 맞은 세상에서 인간성을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묻는 휴먼드라마에 가깝다.
배경도 성격도 모두 다른 두 주인공의 선택은 연대다.
마지막에 둘은 소재는커녕 생존 여부조차 알 수 없는 '모루'의 이모를 찾아 목적지 없는 방랑을 감행한다.
희망을 찾기 어려운 세상에서 희망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무모하지만, 둘의 뒷모습은 따뜻해 보였다.
소설은 녹지 않는 눈을 녹게 만드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아니냐고 묻는다.
이미 우리는 코로나 펜데믹을 통해 깨달았지 않았는가.
내 이웃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내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일상을 회복하는 힘은 연대의 따뜻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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