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밀하게 세공한 보석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었다.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만든 시대극이고, 곳곳에서 고어와 방언이 튀어나오는데도, 고루한 인상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읽는 내내 작가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소설 집필에 공을 들였는지 느껴져 혀를 내둘렀다.
시대극 특유의 온갖 사회적 제약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갈등, 그 갈등 속에서 결핍과 비틀린 욕망에 잠식되거나 불나방처럼 파멸을 알면서도 사랑에 몸을 던지는 주인공들.
그들의 몸부림이 가슴 아프고 처절한데도 아름다웠다.
여기에 반전에 반전이 계속돼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들 모두 입체적이면서도 매력적이어서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치명적인 사랑을 다룬 김진규 작가의 장편소설 <달을 먹다>(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를 떠올렸는데, 당대 생활상을 묘사하는 디테일은 몰라도 이야기의 흡인력은 이 작품이 더 좋았다.
양이 상당한 소설이어서 2~3일 나눠 읽을 생각이었는데 실패했다.
읽다 지쳐 몇십 페이지만 남긴 채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저 읽었다.
이 작품이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니.
정말 많이 놀랐다.
책장을 덮은 뒤 뭐랄까... 뒤통수를 거하게 한 방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젊은 작가는 현재를 이야기해야 하고, 시대극은 어느 정도 경륜을 가진 작가가 다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젊은 작가가 시대극을 다루는 건 현재에서 소설로 다룰 이야기를 찾지 못해 변명하는 건 아닌지 의심해왔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내 의심이 오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내가 지나치게 쫓기듯 급하게 소설을 써온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했다.
나는 지금 쓰는 소설이 내가 마지막으로 쓰는 소설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항상 안고 산다.
먹고 살기 위해 월급쟁이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가 언제나 돼 있고, 그 전에 어떻게든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늘 사로잡혀 있다.
미래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 쓸 기회가 생기면 밤을 새우든 굶든 어떻게든 1~2달 사이에 장편소설 집필을 끝내는 게 패턴이었다.
그렇게 집필을 마친 원고는 다시 들여다보기 싫을 정도로 질려서, 고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조금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더 원고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면, 훨씬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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