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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윤순례 장편소설 <낙타의 뿔>(은행나무)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1. 5. 20.


얼마 전에 집필을 마친 새 장편소설 초고를 퇴고해야 하는데, 들여다보기 싫어서 집필실에서 빈둥거리고 있다.
시간을 보내는데 제일 좋은 수단은 역시 소설 읽기다.
집필실 서재를 뒤적거리다가 작년에 토지문화관 집필실에서 함께 머물렀던 윤순례 작가의 소설을 발견했다.
작가는 토지문화관뿐만 아니라 횡성 예버덩문학의집에도 머물렀던 모양이다.
다시 만난 듯한 반가운 마음이 들어 소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몽골 설화로 시작한다.

아주 오래전 신께서 낙타에게 뿔을 주셨다.
마음이 착해 상을 주신 것이다.
어느 날 꾀보 사슴이 낙타에게 와 말했다.
"뿔 좀 빌려다오. 잘 차리고 서역 잔치에 가련다."
낙타는 곧이 믿고 뿔을 빌려주었다.
사슴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낙타는 늘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사슴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이 설화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바다에 빠져 실종된(죽은 게 확실한) 연인이 살아 있다고 믿으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20대 여성 효은, 효은의 아버지와 결혼한 지 반 년도 지나지 않아 과부가 된 뒤 비자와 유산을 받으려고 버티는 조선족 여성 애선, 애선을 등처먹다가 빚을 갚겠다며 뻔뻔하게 효은의 집에 눌러앉은 사기꾼 구 씨. 뿔을 잃은 낙타를 닮은 이들이 낡은 빌라에 모여 기묘한 동거를 하며 각자의 사슴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아무런 인연도 없었던 이들이 한 지붕 아래 사는 모습이 처음에는 긴장감 있게 그려지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이들이야말로 진짜 가족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전개가 인상 깊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짜증이 났는데, 소설의 끝에 다다를수록 이들이 오래도록 기묘한 동거를 지속하며 행복해지기를 응원하게 됐다. 아울러 곳곳에 숨어있는 반전은 캐릭터에 입체감을 더한다.

소설은 효은은 말없이 집을 나간 애선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난다. 하지만 연인을 잃고 오랫동안 상실감에 빠져있던 과거와는 다른 기다림이다. 취업해 열심히 일하고, 언제든지 애선이 돌아올 수 있도록 낡은 빌라를 지킨다. 소식은 끊겼어도 애선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작가가 소설로 하고 싶었던 말은 "기다리는 마음이 있으면 내일을 포기하지 않게 된다"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 소설은 꽤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언젠가 다시 레지던시에서 작가를 만나면, 이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눠야겠다.